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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출근을 해고하다/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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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이어 오던 출근을 해고해 버렸다
제일 먼저 책상과 의자가 뒷걸음쳐 떠나고
휴대전화 목소리가 떠나고
퇴근 시간과 모든 것을 이어 주던 골목이 떠나고
공복으로 중얼대던 아침이
까만 양복 넥타이가 떠나고
구두는 뒤축이 꺾였다

나를 해고한 순간 회사는 알까
내가 거느리고 있던 수많은 것들을
내가 또 해고해야 된다는 사실을
누구든 한 직장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수많은 골목이 목을 매고
넥타이가 수시로 내 목을 노리고 있다는 것
그런데 회사는 왜 빈자리를 요구할까
아침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야말로 악독한 경영주였구나
이제 다시 신입 사원을 뽑아야지,
혼자 먹는 아침을 채용하고
후줄근한 체육복을 채용하고
쓸쓸한 공원을 배회하는 한나절을 채용하고
뒷산에 나타나는 다람쥐 면접을 보러 가고

건망증 안경과 게으른 흰머리를
해고하고 채용하고,
과로한 침대가 쓰러지면서 티브이를 걸고 넘어졌다
내가 채용한 것들에게 퇴출당하고
침대 모서리에 기대어 잠시 위로받고 위로하고
배부른 잔소리와 배고픈 강아지 밥그릇만 내 곁을 지켰다
실업도 오래되면 직장이 된다


[오후 한 詩]출근을 해고하다/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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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순전히 착각이겠지만 내가 어렸을 땐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요즘엔 새삼 말하지 않아도 취직을 하지 못한 사람과 실직하는 사람이 늘어나기만 한다. 왜 그런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러나 이 시를 읽어 보면 적어도 그들을 함부로 탓하는 것도 마음 없이 손을 내밀어 위로하는 것도 모두 온당치 않다는 것은 알겠다. 이미 그들은 더없이 고통스럽고 쓸쓸하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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