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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98]인사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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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많이 변했습니다. 익숙한 간판들보다 낯선 상호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이 길도 서울 여느 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어져가는 느낌입니다. 저도 어느새, ‘회고(懷古)’ 습관이 든 것일까요? 어제와 오늘을 자주 견줍니다. 달라지는 삶의 ‘문법’을 아이처럼 익히고, 바뀌는 게임의 ‘규칙’을 자꾸 들여다봅니다.

이 길 위에는, 제 살던 집을 나그네에게 묻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만 같습니다. 눈감고도 걷던 길을, 두리번거리며 지나는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밀려나는 것들은 무엇이나 안쓰럽습니다. 걱정이 새끼를 칩니다. ‘조선’이나 ‘한양’의 흔적을 기대하며 이곳을 찾아오는 외국관광객들에게도 공연히 미안해집니다.
문제와 답이 뒤엉킵니다. ‘인사동이 젊어졌다고 해야 하나, 새로워졌다고 해야 하나. 현대화라 해야 하나, 세계화라 해야 하나. 주저앉으려던 집들을 반듯하게 일으켜 세우고, 세월의 먼지와 티끌을 털어내는 것이야 누가 뭐랄까. 부모님 늙은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처럼, 반가운 ‘회춘(回春)’의 기미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걷다 보니, 약속장소입니다. 윤 선생의 ‘노상(路上)작업실’입니다. 가로수에 빨래들처럼 내걸린 그림들이 인사를 건넵니다. 초록색의 별과 풀꽃과 돌고래가 그려진 티셔츠와 손수건들입니다. 그는 18년 동안, 날짜와 시간을 정해두고 이 자리에 나와 그림을 그립니다. 페인트공의 행색으로 지구를 지킵니다.

‘날마다 지구의 날’(everyday earth-day)이란 명제를 선승(禪僧)의 화두(話頭)처럼, 일 년 365일 안고 삽니다. 지구를 생각하는 일이 생활입니다. 환경운동을 하되, 김구 선생이나 윤봉길 의사처럼 합니다. 옳다고 믿는 것은 곧바로 실천으로 옮깁니다.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습니다.
저는 그의 광신도입니다. 그의 이상과 신념을 ‘그린이즘(Green-ism)’이라 부르고, 그를 교주로 모십니다. 강연을 하러 가면, 그의 그림부터 걸어놓고 시작합니다. 온갖 동식물 ‘실루엣’으로 사람의 얼굴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과 모든 생명체와 동등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지요.

그는 오늘도 뙤약볕 아래 엎디어, 그림으로 복음(福音)을 전합니다. 마침, 중국 젊은이 한 사람이 입고 있는 옷에 그림선물을 받고 있습니다. 반쯤 누워서 선생의 붓질이 끝나길 기다립니다. 이윽고, 흰 셔츠에 푸른 별 하나가 생겨납니다. 친구들이 박수를 칩니다. 호기심의 눈길들이 이내 존경의 시선으로 바뀝니다.

저만치서 일인시위를 하던 사람이 선생 곁으로 다가와 허리를 굽힙니다.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라 쓰인 피켓을 들었습니다. 초록 모자를 쓰고, 녹색 천을 치마처럼 둘렀습니다. 팔뚝엔 산양(山羊)의 문신이 보입니다. 선생이 그림으로 전하는 이야기를 이 남자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두 남자가 꿈꾸는 세상에 제 생각도 보태고 싶어집니다. “아름다운 풍경은 불편을 감수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賞)이어야 한다.” 제 오랜 믿음입니다. 설악산의 비경(?境)은, 숨이 턱에 차도록 걸어 오른 자만이 만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금강산 비로봉이나 만물상도, 수천 년 불편한 길 끝에 숨어있어서 금강산일 것입니다.

선생 댁엔 냉장고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없던 것은 아닙니다. 자동차를 버리고, 집에서 식판(食板)을 쓰더니, 그것마저 치운 것이지요. 많은 이들이 놀라워하며 묻습니다. ‘냉장고 없이 어떻게 살지요?’ 그의 답은 아주 심플합니다. “지구 위엔 냉장고 없는 사람이, 가진 사람보다 수십 수백 배 많습니다.”

모두가 냉장고 없는 삶을 따르라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지요. 지구를 위해 사람이 무조건 참고 견뎌야한다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인간의 ‘리모컨’으로 산천(山川)을 움직이고 지배해선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편리해지고 편안해지는 동안, 지구는 자꾸 열이 오르고 숨이 가빠진다는 것을 잊지 말자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최근에 쓴 제 동시 한편을 소개하고 싶어집니다. 제목은 ‘부자나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천만 년 전에 주신 것을//처음 받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게/아직도 새것처럼 쓰고 있어서/돈 주고 살 것이 별로 없는 나라//히말라야 산속 나라들처럼/ 남태평양 섬나라들처럼.”

안나푸르나의 만년설(萬年雪)을 떠올리며 썼습니다. 망망한 바다위의 섬들도 생각했습니다. 저는 정말 궁금합니다. 태초에는 하나같이 ‘새 것’이었던 하늘 땅 바다가, 어디는 아직도 새것이고 어디는 아주 망가져버렸을까요? 종교와는 상관없는 얘기입니다. 그저 동화적인 발상일 뿐이지요.

철없는 몽상은 꼬리를 뭅니다. 서울에도 산골마을이 있고, 시내 한복판에도 섬 하나쯤 있으면 어떨까요? 헛소리지요? 그래도 빌고 싶은 소원 하나. ‘먹(墨)의 향기’와 화장품 냄새는 섞이지 않기를! 인사동은 인사동, 설악산은 설악산이기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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