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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94]안경점에서

최종수정 2018.06.01 09:10 기사입력 2018.06.01 09:10

윤제림 시인
윤제림 시인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선글라스를 쓰고 계십니다. 명창 ‘박녹주’ 선생이 북을 안고, 소리를 하는 장면입니다. 만년(晩年)의 모습입니다. 제가 즐겨 듣는 ‘흥보가’ 음반에 있는 사진이지요. 재미있다 싶으면서도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이 어른이 늘그막에 젊어지고 싶어 멋을 부리셨던 걸까?’.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유를 알았습니다. 글씨가 깨알 같아서 늘 외면하던 해설문에서, 선글라스의 사연을 읽었습니다. “남아있는 박녹주의 말년 사진은 대개 검은 안경을 쓰고 있는데, 한쪽 눈을 실명한 탓이다.” 외할머니를 오해한 손자처럼 부끄러웠습니다. 어른들이 자주 쓰던 말도 생각났습니다. ‘공연히 색안경 쓰고 보지 마시오.’

제가 ‘색안경’을 쓰고 본 것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의 시선입니다. 반성의 마음이 황급히 일어납니다. 한쪽 눈을 감고, 노래를 불러봅니다. 남은 한쪽 눈, 마저 감고 싶어집니다. 선생의 선글라스는 어쩌면, 시력을 잃은 눈에 대한 배려였을지 모릅니다. 아니, 두 배로 고생하게 될 다른 한쪽 눈에 대한 예의였을 것입니다.

‘서편제’ 주인공 ‘송화’가 겹쳐집니다. 뜬 눈으로도 제대로 못 보는 세상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절절히 펼쳐내던 여인입니다. 먼눈에 맺히던 눈물이 또렷이 떠오릅니다. 생각건대, 판소리는 소리로 만든 영화입니다. 의성어 하나가 기가 막힌 ‘미장센’을 이룹니다. 의태어 하나가 청중을 들었다 놓았다 합니다.

안경점에 와서 소리를 생각합니다. 눈앞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바짝 다가와 섭니다. 물론 환각입니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김벌래’ 선생입니다. 세상 만물을 음향으로 다스리던 사람입니다. 그가 만든 소리는 귀에 들리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였습니다. TV에 나타나고 스크린에 떴습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94]안경점에서
사물들이 그가 시키는 대로 소리를 냈습니다. 콜라병 뚜껑은 그의 명령대로 ‘뻥뻥’ 열렸고, 리모컨은 ‘삐융삐융’ 에어컨을 켜고 껐습니다. 그는 해 뜨는 소리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모두 웃었지만, 저는 그의 말을 믿는 쪽이었습니다. ‘꽃피는 소리’ 얘기를 들었던 기억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이란 영화에 쓰인 효과음이었습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감독도 퍽 만족스러워했다지요. “...이이...이이잉”. 아주 먼데서부터 벌 한 마리가 날아드는 소리였습니다. 모기소리만 하던 것이 점점 커지는 동안, 꽃봉오리는 시나브로 벌어졌습니다. 벌이 내려앉는 순간, 꽃은 활짝 피어났습니다.

누가 틀렸다 하겠습니까. 꽃 한 송이도 혼자 힘으론 피어날 수 없는 법. 어디선가 ‘번져오는’ 기운이 있어, 꽃도 열매도 새롭게 생겨납니다. 워낙 고요한 영화였으니, 벌의 소리가 항공기 소음만큼이나 요란했을 것입니다. 나비도 따라왔을 테지요. 나비가 우주를 끌어안았을 것입니다.

‘장석남’ 시인의 시(‘수묵정원 9’)가 떠오릅니다. “....(전략)..../번짐,/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또 한 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번짐,/번져야 사랑이지//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소리가 풍경을 밀고 오고, 풍경이 음악을 데려옵니다. 전후(前後)가 좌우(左右)를 간섭하고 시간이 공간을 흔듭니다. 셰익스피어 전집과 뮤지컬이 싸웁니다. 문장과 노랫말이 다툽니다. 청중보다 관중의 힘이 막강해집니다. 귀와 눈은 점점 더 사이가 나빠집니다. 양쪽의 헤게모니(hegemony) 싸움이 볼만합니다.

본래는 ‘귀’가 윗길이었습니다. ‘구텐베르크(J. Gutenberg)’의 인쇄술 덕분에 ‘눈’이 귀보다 우월해졌습니다. 예수님 말씀도 부처님 가르침도, 읽고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눈은 이제 구름이나 물결을 바라볼 여유도 없습니다. 지독한 과로와 일방적인 혹사, 착취에 시달립니다.

KTX의 스피드로 달아나는 세월의 폭력 앞에서 딴청을 부릴 겨를이 없습니다. 한눈을 팔지 못합니다. 빛과 색깔의 잔치에 넋을 잃는 날이 대부분입니다. 전자기술이 자연색상에 가까운 ‘화질과 해상도’를 말하지만, 눈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지릅니다. 오늘의 눈은 식탁의 평화와 침실의 휴식조차 보장받지 못합니다.

책과 친한 사람이 아니어도, 안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경’이 우등생의 별명이던 시절이,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귀가 행복해진 것도 아닙니다. 젊은이들은 이어폰을 끼고 삽니다. 눈과 귀에 차별을 두지 않으려는 것일까요. 제 눈엔 귀와 눈 모두를 학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 눈도 그리 좋은 팔자는 아닙니다. 지난해보다 더 나빠진 것 같습니다. 시력검사 끝에, 렌즈를 바꾸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눈을 어지간히 들볶았던 모양입니다. 무엇에 빠지고 홀리었던지 생각해봅니다. 귀는 무시하고, 눈만 믿고 따른 것은 아닌지 되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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