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자면 요즘 나의 스승은 학생들이다. 학생들을 통해 내가 배운다. 학생들에게 내가 내세울 것은 먼저 태어나 공부길을 앞서 걸었다는 것이지 어떤 다른 거창한 진리를 설파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서 학문을 가르치는 사람을 가리키는 교수님이라는 호칭보다 '먼저 산 사람'이라는 의미의 선생님이란 호칭이 더 정겹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나이를 앞세워 훈계했다가는 꼰대소리 듣기 딱 좋고 공부를 가르칠 때도 눈높이를 잘 맞춰야 한다. 이러나저러나 고민인 스승의 날, 선생이라는 위치를 생각하며 앞서 사는 사람으로서의 반성을 하는 중이다.
이 말에 아이들 눈빛이 살짝 흔들린다. 그래도 장밋빛 미래만 이야기하기보다 현실의 자리를 그대로 일러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늘 이 작전을 고수한다. 앞서 산 사람으로서 젊은이들에게 내가 들려줄 수 있는 유일한 말, 인생은 천천히 태어난다는 것. 산통은 엄마만 겪는 고통이 아니라 아가도 겪는 고통이기에 지금 우리 모두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산통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 죽는 순간까지 계속 그러리라는 것. 그러니 우리는 천천히 태어나는 삶을 매번 배워간다는 것.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는 내가 좋아하는 김서령 작가의 책 제목이기도 한데 읽어보지 않은 분들께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스무 살 시절에 인생이 결정된다고 믿는 대한민국의 청춘들에게 느리게 태어나는 삶을 보는 건 그 자체로 큰 공부다. 살면서 운명의 배는 엎치락뒤치락 여러 번 뒤집힌다. 그 매번의 파도와 풍랑은 삶이 새로 태어나는 기회이기도 하다. 한시를 즐겨 읽고 붓글씨를 쓰시던 아버지는 지금 아름답고 순한 우리말로 시를 쓰신다. 여든의 아버지가 시인으로 태어나는 걸 보면서 나는 꽃은 봄에만 피는 것이 아니라는 걸 실감한다.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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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빼려고 맞았는데 아이가 생겼어요"…난리난 '... 마스크영역<ⓒ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