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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뜨거운 팥죽을 먹으며/이근화

최종수정 2018.05.11 09:29 기사입력 2018.05.1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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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위의 사람도 떨어뜨린다는 팥죽 한 사발을 앞에 두고
숟가락이 무겁다 속을 훑어 내린다
입술이 점점 붉어지고
한 숟갈 한 숟갈 당신에게 더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는 죽음

팥죽 한 그릇을 해치우는 데 철학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
지나가는 길이었고
모르는 사람이었고
낡은 식당이었는데
남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뜨거워졌다 가라앉았다

허기도 발걸음도 뒷모습도 나는 잘 모르고
반쯤 떠 있는 새알심을 건져 올릴 때
죽은 사람이 죽은 냄새가 죽은 목소리가 떠올랐는데
그것은 왜 뜨겁고 달콤한가

낡은 의자가 툭 꺼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내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는 것일까
뻘건 죽 한 그릇에 돌아가지 못하고
기어이 땅에 떨어지고 만 사람들

귀신이 아니라 귀신 같은 얼굴로 뜨거운 팥죽을 먹었다
반쯤 열어 둔 창문으로 찬바람이 밀려들어 왔다

■언젠가부터 어느 TV 채널에서나 소위 '맛집'을 찾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심지어 어느 프로그램에서는 음식 전문가 혹은 미식가를 자처한 이들을 동원해 음식에 대한 이야기들을 한 시간 내내 떠들기도 한다. 그래, 좋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맛있는 음식을 즐겨도 될 만큼 향상되었다는 뜻도 되니까. 그렇지만 '맛집 프로그램'들의 천박하기 짝이 없는 상술은 차라리 그러려니 해도 음식을 앞에 두고 벌이는 요란하기 짝이 없는 언행들은 미안하지만 값싼 스노비즘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음식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그러니 경건해야 한다. 당장 당신이 먹고 있는 "뻘건 죽 한 그릇에 돌아가지 못하고" "기어이 땅에 떨어지고 만 사람"이 있다. 음식을 공손히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먹어야 하는 까닭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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