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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88]외암리에서

최종수정 2018.04.20 09:25 기사입력 2018.04.20 09:25

윤제림 시인

아산 외암리 민속마을. 차를 세우고 국수집부터 찾았습니다. 여기 온 진짜 이유가 거기 있었으니까요. 그 집은 여전히 옛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외관은 좀 변했지만 음식 맛은 여전합니다. 멸치국물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점잖고 은근한 맛을 선물해준 멸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갓 삶아낸 국숫발이 살아서 꿈틀댑니다. 도시엔 '이름만 멸치국물', '말만 잔치국수'가 대부분인데 여기서 제 맛을 봅니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름과 내용이 서로를 배신하는 음식이 얼마나 많습니까. 멀건 국물이 멸치를 부끄럽게 만들고, 탄력을 잃은 면발이 국수 망신을 시킵니다.

국수 한 그릇에 허리가 곧추섭니다. 팔자걸음으로 식당을 나섭니다. 원하는 맛을 보고 나니, 어제의 '섭섭함'도 조금은 누그러집니다. 즐겨 다니던 칼국수 집이 아주 문을 닫는다지 뭡니까. 점심 먹으러 갔다가 알게 된 일입니다. '영업종료'를 알리는 안내문이 나붙었더군요.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었습니다. 당혹스럽고 허탈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상에서, 이삼십년 단골 음식점이 문을 닫는다는 것만큼 큰 뉴스도 드뭅니다. 생활의 배경 하나가 자취를 감추는, 대형사건이지요. 단골손님은 지독한 상실감을 견뎌야 하고, 대체될 수 없는 맛의 기억을 지워야 합니다. 입맛을 길들여놓은 연인이, 느닷없이 절교나 이별을 선언하고 사라진 경우와 흡사합니다.

어머니 손맛을 볼 수 없게 된 사람의 처지라 할 수도 있습니다. 남은 사람은 금단(禁斷)의 아픔을 견뎌야 합니다. 저는, 칼국수 집 '겉절이'에 대한 그리움을 참아낼 일이 걱정입니다. 잊을 자신이 없습니다. '금세 밭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처럼' 생기가 넘치는 김치였지요. 그 맛의 기억이 무시로 저를 힘들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 어느 곳의 국수가 낯선 김치와 짝을 이뤄서, 제 간사한 입맛을 사로잡겠지요. 세상에 국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국수는 '백석(白石)' 시인이 반색을 하며 칭송하던 음식.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심심한 것은 무엇인가".

'이 반가운 것'을 먹고 나서 외암리(巍巖里) 마을을 바라봅니다. 또 다시 백석의 질문을 던져봅니다.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이 그지없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잔치국수를 먹었으니, 이제 잔치를 보러 갈 차례입니다. 울긋불긋 꽃 대궐, '봄꽃 잔치'입니다.

제비꽃, 민들레, 금낭화, 산당화, 수선화. 이팝꽃, 조팝꽃, 배꽃, 사과꽃, 박태기꽃, 살구꽃…. 제가 알고 있는 모든 봄꽃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도 전혀 야단스럽거나 시끄럽지 않습니다. 수선스럽게 모여 피지 않고, 골목 끝이나 담장 너머에 조용조용 피었습니다. 물 오른 냇가의 수양버들만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시냇물도 명랑하게 흘러갑니다. '이원수' 선생의 동시 '고향의 봄'이 꼭 이 마을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살구꽃 피는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던 어느 시인의 시 한 줄도 겹쳐집니다. 누구 고향이 이런 모습 아니겠습니까. 외암리는 지금 이 땅의 평균적인 봄 풍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집이나 고모네 같고, 외할머니네 같습니다.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나와 반겨줄 것만 같습니다. 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으면, 주인은 어느새 국수를 삶아 내오겠지요. 개다리소반에 김치도 따라올 것입니다. 꼴이 하도 사나워, 젓가락이 쉽게 다가가지 않을 김치입니다.

시어 꼬부라진 것도 같고, 볼품이라곤 없습니다. 하지만, 김치 없이 어떻게 국수를 먹습니까. 눈을 질끈 감으며, 김치 한쪽을 입에 넣습니다. 순간, 맛있는 국수가 세상에 날 때 김치도 함께 태어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까 그 김치가 그랬습니다. 수북하게 담긴 김치 한 그릇을 혼자서 다 먹었습니다.

외암리에는 '민박' 표지가 붙은 집이 여럿입니다. 여러 날 지내보고 싶은 집도 두어 군데 눈에 듭니다. 이 마을에서 며칠 쯤 묵게 되면, 하루 한 끼는 국수를 먹고 싶습니다. '일일일면(一日一麵)'! 매표소 앞 식당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잔치국수를 먹거나, 주인아주머니에게 칼국수를 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상국(李相國)' 시인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모양입니다. 그의 시('국수가 먹고 싶다')가 말합니다. "사는 일은/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때로 허름한 식당에서/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국수가 먹고 싶다…(중략)…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국수는 참으로 조용하고 온화한 먹거리입니다. 어머니처럼 자비롭고 평화로운 음식입니다. 일본의 어느 식품회사 슬로건이 떠오릅니다. '인류는 면류(人類は 麵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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