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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키위, 혹은/정창준

최종수정 2018.04.12 15:37 기사입력 2018.04.12 10:11

지금 둘이 살기도 빠듯하고 힘든데 애를 낳으면 어떻게 해요? 애는 누가 키우구요? 우리가 뻐꾸기처럼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것도 아닌데, 친정엄마도 아프고 시어머니도 질색이신데, 지금도 아파트 대출 원금은커녕 이자 갚기도 힘이 든데 아기를 낳는 순간 직장에서 잘릴 게 뻔한데 당신이 벌어 오는 고만고만한 월급으로 세 식구가 어떻게 살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에게 우리의 삶을 온전히 물려주기는 싫어요. 제발 날개가 퇴화되기 전의 우리 부모들과 우리의 삶을 동일시하지 말아요.

여기서 한나절을 꼬박 날아가면 닿게 되는 뉴질랜드에는 날지 못하는 새가 있다지. 제 이름을 스스로 부르는 새라는데, 키위 새는 날개를 쓰지 않다가 끝내 날개가 퇴화되어 손톱만큼도 날지 못하고 땅 위를 걸어 다닌다지, 그러다가 물려 죽거나, 제 몸의 4분의 1이나 되는 알을 낳다가 대부분 죽는다는데, 혹시 순산을 하게 되더라도 평생을 날개 없이 걸어 다녀야 하는 숙명을 물려주어야 한다는데, 키위 새가 사는 법은 알을 낳지 않은 것, 그리고 알을 낳지 않기 위해서는 짝짓기도 하지 않는 것,

우리처럼.




■'절대적 빈곤'은 의식주 등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의 가난을 말한다. 이에 비해 '상대적 빈곤'은 다른 사람과 견주어 주관적으로 느끼는 심리적 빈곤을 뜻한다. 그런데 한번 묻고 싶다. 이 시에 적힌 빈곤은 절대적인 것인가, 상대적인 것인가? 나는 '절대적 빈곤'이라고 생각한다. 살기 위해 아이 낳기를 포기하는 게 어떻게 '상대적'일 수 있겠는가. 생식은 개체가 생존하는 목적이다. 생존의 목적마저 단념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처지를 두고 '상대적' 운운하는 처사는 지나치게 냉혹하다. 아니 그보다 애초부터 '상대적 빈곤'이라는 조어는 정도야 어쨌든 살아갈 수는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그래서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에 따른 우리 공동의 책임을 각 개인에게 전가하고 불평등과 양극화를 역설적이게도 자연화한다. 특히 '상대적 빈곤'을 들먹이며 젊은 세대를 향해 자행하는 시기 어린 질책은 가히 추악하다 할 만큼 모질다. 그들은 진짜 전쟁이 무엇인지 모른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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