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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빛보다 멀리 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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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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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속도로 간다'는 말이 있다. 빛은 빠를 뿐 아니라 멀리 가는 것을 대표한다. 그런데 빛보다 멀리 가는 것이 있다 한다. 바로 사람의 목소리. 중국의 작가 위화의 말이다. "인민이 단결할 때 그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전달되고 그들 몸의 에너지가 그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된다."는 깨달음을 작가는 스물아홉 되던 해, 천안문 광장의 백만 인파 속에서 깨달았다 한다.

우리에게도 그 기억이 있다. 미완의 혁명으로 기억되지만 1987년 6월 대항쟁이 그러하고, 촛불로 하나 되었던 2016년 겨울의 기억, 그 이전에도 무수히 많은 목소리와 몸의 기억들이 있다.
온 국민에게 깊은 내상을 입힌 현대사의 비극들을 딛고 넘어지며 우리는 크고 작은 변화를 맞고 있다. 그 변화 속에서 각자가 느끼는 감회와 새로움은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매 기념일마다 듣는 대통령 축사와 추념사가 특별히 다가온다.

일주일 전 4월 3일, 대통령은 제주도 4.3 희생자 추모일 추념사에서 "돌담 하나,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 통곡의 세월을 간직한 제주에서 이 땅에 봄은 있느냐"고 물었다. 무려 70년 동안 유족들이 속울음으로 되물은 질문이 이 땅의 대통령 목소리로 나온 것은 실로 엄청난 변화다.

한 시인은 제주의 바람을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이종형)이라고 한 바 있는데, 대통령이 봄을 빼앗긴 제주의 70년을 회억하고 목소리를 낸 것 자체가 죽은 사내들과 아내들과 아이들의 울음을 대신 울어준 것이기에 우리 모두에게 실로 큰 위로다.
목소리는 한 몸에서 나오지만 한 몸에서 나온 목소리가 여러 몸으로 전이될 때 더 큰 에너지를 갖는다. 최근 '미투 운동'을 비롯하여 성폭력과 국가권력이 자행한 폭력에 싸워 맞서는 것은 바로 그동안 힘이 없어 속울음으로 울었던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들이다. 그 막혀 있던 울음을 뚫어주고 다독여 주는 것도 바로 사람의 목소리다. 크고 작은 사람의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빛보다 더 멀리 가고 빛보다 더 강한 연대의 에너지를 확인한다.

40년 전에 소설 <순이 삼촌>으로 제주의 4.3을 처음 알린 작가 현기영은 "학살보다 무서운 것은 망각"이라고 했다. 과거를 회억(回憶)하는 것은 갈등이나 투쟁의 씨앗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억압되고 억눌려 있던 작은 진실들을 회복하여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살기 위한 평화로 가는 첫 걸음이다. 우리 역사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어온 이념 싸움, 적대와 증오를 거두고 공존을 위한 터를 만들려면 더 적극적인 애도와 상처의 치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계속 기억하고 기록하고 목소리를 내야 한다.

망각과의 싸움을 통해 치유 받는 쪽은 피해자만이 아니다. 불편한 일에 "기억 안 나요"라며 수없이 변명하고 회피해온 우리 자신을 보더라도, 기억하고 말하는 행위는 진정한 자기 모습을 대면하는 일이다.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첫 단추도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와 몸의 에너지는 빛보다 멀리 간다.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입이 없었던 존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다독다독 보살피고 응시하고 회복할 때다. 아픔 많은 4월에 기적처럼 꽃이 피었듯, 이 땅의 봄을 부르는 크고 작은 목소리들에 희망을 품어본다.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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