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명동성당 앞의 의거 현장. 1909년 12월22일 이재명은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있었다. 오전 11시께 이완용이 성당에서 나오자 그는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막는 사람이 있었지만 제압하고 이완용의 허리를 찔렀고 도망가려하자 어깨를 다시 찔렀다. 성공했다고 생각한 그는 만세를 부르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담배를 빌려 피웠다. 그의 나이 스물세 살이었다.
이날 의거를 보도한 신문 기사는 이재명의 풍채에 대해 "용모가 화려하고 눈에 영채가 있다"고 썼다. 그는 미국노동이민회사를 통해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갔는데 조국이 일제에 강점됐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첫 목표는 침략의 원흉으로 꼽히던 이토 히로부미였다. 하지만 안중근이 1909년 10월26일 이토를 사살하자 을사오적을 비롯한 친일매국노를 없애기로 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미국에 있을 때부터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다"고 말했다. 조사 중 공범이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는 "공범이 있다면 2000만 동포"라고 했다. 이듬해인 1910년 일제는 이재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최후 진술에서 그는 "왜법이 불공평해 나의 생명을 빼앗지만 조국을 위한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한다"고 했다. 이 말의 무게가 그의 순국 107주기를 맞은 날, 명동성당 앞 표지석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한다.
김철현 기자 kc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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