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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사드는 트리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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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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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그룹이나 현대차그룹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갈등은 트리거(방아쇠)에 불과했던 거죠. 중국시장에서 언젠가부터 경쟁력을 잃은 게 더 근본적인 원인이 아닐까요? 예전의 황금기는 다시는 오지 않을 겁니다. 이제는 무언가를 회복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완전히 다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 같아요."

뜻밖의 자성에 듣던 사람들이 더 놀랐다.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이윽고 다른 이가 말문을 연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1992년 이듬해 베이징에 와 지금까지 살고 있는 교민이다. 그는 "중국의 정보기술(IT) 산업이 한국보다 뒤처진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했다. 곳곳에서 "아닌 것 같다"는 대답이 더 많이 들린다. 그는 "한국 기업은 최고경영자(CEO)조차도 여전히 한국이 월등히 앞서 있다고 착각하는데 문제의 본질은 그런 사고 방식에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에만 얽매여 중국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보지 못할 뿐더러 애써 외면하려는 독특한 심리가 있다는 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해 7월 주한 미군의 한반도 사드 기습 배치 결정 이후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 우리 기업인의 심경은 여러 단계를 거쳐 '체념'에 이른 것 같다. 사드 보복 초창기만 해도 '이러다 말겠지. 잘 풀리겠지'하며 안이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시시각각 급변해 기업의 존폐를 놓고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중국시장 진출 25년 동안 쌓은 탑이 불과 1년 만에 무너져 회복 불능 상태가 돼 버렸다. 한중 수교 직후부터 중국에서 교민사회를 지킨 한 중견기업인은 "기회의 땅이라는 부푼 꿈을 안고 건너 와 적당히 돈을 벌면서 지난 25년간 허송세월을 보낸 것 같아 자괴감마저 든다"고 털어놨다. 한중 관계가 경제가 아닌 외교적 리스크로 순식간에 망가질 것이라고 예상한 기업인은 거의 없다고 했다.

시간을 되돌려 롯데가 사드 부지 제공을 하지 않고 버텼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부질없는 이야기지만 최소한 중국 사업 철수를 고려해야 할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말 이렇게까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는 롯데 임원의 뒤늦은 고백은 주워 담기에는 이미 골든타임을 놓쳤다. 적은 물론 아군의 실정도 모르고 싸우다 패한 꼴이다.

중국 공장 가동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킨 현대차는 또 어떤가. 중국의 사드 보복에 따른 판매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드를 전후로 놓고 보면 현대차가 차를 제대로 팔지 못하기 시작한 건 엄밀히 말해 사드 이전부터다. 총수 공백 상황에서도 글로벌시장에서 승승장구하는 삼성전자 스마트폰은 유독 중국에서만 존재감이 미약하다. 사드 갈등이 없었다면 갤럭시 시리즈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을까. 잔고장이 잦고 디자인이 후진데 값만 싸다면서 조롱했던 샤오미나 화웨이 같은 중국 로컬 기업은 이제 저만치 앞서 다른 길을 개척하고 있다.
사드 보복이 아닌 자발적 애국주의 탓이라는 중국 정부의 '아몰랑' 반응은 얄밉기 짝이 없다. 그러나 자국민이 갤럭시 스마트폰을 사지 않고 현대차를 더 이상 타지 않으며 롯데 제품을 외면하는 것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는 중국 정부의 변명은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기업이 탈(脫)중국의 기회를 엿보는 점도 걱정이다.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베트남이나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등 아세안 국가는 중국에서 백기투항한 손님 받을 준비로 들떴다. 제2의 기회의 땅으로 생태계를 옮긴들 그 평형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지는 우리 스스로의 실력에 달렸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베이징 김혜원 특파원 kimhy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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