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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아픈 몸을 사는 일

최종수정 2017.08.23 14:33 기사입력 2017.08.22 10:54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아시아경제]많은 일이 우연에서 우연으로 이어진다. '봄날의 책' 출판사에서 북 콘서트 초대를 메일로 받았을 때, 살짝 망설였다. 방학이지만 일이 켜켜이 쌓여있던 터라 하루 저녁을 비우는 행사는 조금 부담됐다. 하지만 '아픈 몸을 살다'라는 책이 워낙 감동적이기도 했고, 역촌역 근처 작은 서점에서 열리는 행사가 어떨까 궁금증도 생겨 가겠노라고 메일을 보냈다. 5000원을 입금해야 하는데 좀 민망해서 10000원을 입금했다.

마음결 고운 출판사 대표님은 누가 같이 오냐고 성함을 물어오셨는데, 난 후원금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액수를 얹어 보낸 게 부끄러워져 이 행사에 관심 있을 제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기대처럼, 뛸듯이 기뻐한다. 그래서 어느 여름 저녁, 처음 가보는 동네에서 모처럼 학생과 맛있는 저녁을 먹고 처음 가보는 서점에 불쑥 들어간 거다.

'아픈 몸을 살다'는 심장마비와 암으로 오래 고통 받은 사회학자 아서 프랭크의 투병기다. 자신의 질병 경험을 의료윤리학으로 연결해 저술과 강연활동을 활발히 이어가고 있는 프랭크의 책은 단순히 아팠다가 회복된 개인, 절망에서 희망을 본 자의 자기 계발서가 아니다. 문제가 있고 위험하다고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병을 앓으며 하루하루를 사는 이들, 그런 환자를 돌보는 이들, 투병과 돌봄, 애도와 슬픔의 극복, 통증을 이겨내는 법에 관한 현재진행형의 질문이다.

책방 비엥에서 열린 북 콘서트는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쌀롱'의 대표와 이 책 역자의 발제에서 시작하여 통증과 아픔을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앓는 이를 돌보는 이에 대한 관심 등 다채로운 이야기로 채워졌다. 내가 주목한 것은 책 자체의 가치를 넘어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공간의 신비한 힘이었다. 무언가 절실한 경험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돋아나는 연대감은 섣부른 희망이나 가벼운 위안 대신 힘겨운 고통을 묵묵히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 그 공간에 하나둘씩 모인 사람들은 그러한 버팀을 선물처럼 갖고 발걸음 총총히 돌아갔을 것이다. 내일 또 아플지라도.

인간은 저마다 혼자다. 단독자로서 인간의 고독을 가장 절절히 경험하게 하는 것이 육체의 병이다. 병을 앓는 몸은, 타인에게 나누어 줄 수 없는 나만의 독립적인 공간, 절대적인 내 영토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타인의 병을 대신 앓을 수 없다. 그 고통을 짐작할 수도, 나눌 수도 없다. 각자의 고유한 영토인 몸을 살면서 저마다 홀로 아프고 고독하다. 그러므로 병을 앓는 자는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가장 절절한 고독을 견디고 있는 자다. 돌보는 이는 그 사람의 기약 없는 싸움을 마찬가지로 기약 없이 지켜보고 제 몫의 짐을 견디는 자다.
책방에 모인 이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병은 단순히 내 몸에서 쫓아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삶이라는 데 고개를 끄덕였다. 앓는 자와 돌보는 자, 고통과 애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눔으로써 생기는 연대가 그 공간을 빛나게 했다. 고통의 재현 가능성과 불가능성, 아픈 몸의 목격자 되기, 말할 수 없는 용기마저 지켜봐주는 일, 돌보는 이의 몫 등 고통의 미묘한 다른 결을 드러내는 시간이 좋았다. 그 시간은 인간이 왜 인간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저마다는 다시 각자의 터에서 여전한 상처와 고통을 견디겠지만 그 견딤의 성격은 어제와는 다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책과 이야기가 주는 선물을 하나의 변화로 직접 맛보았다. 소외는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공적인 책임으로 탈바꿈한다. 앎의 실천은 그렇게 확장된다.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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