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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55]헌책방 축제에서

최종수정 2017.08.30 15:46 기사입력 2017.08.18 09:08

윤제림 시인
이런 경험 있으실 것입니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막차 타고 집에 가는 길. 버스에 승객은 '딱 한 사람.' '내'가 그 한 사람일 때, '나'는 한없이 곤혹스러워집니다. 급기야, 소설을 쓰게 되지요. '이 버스는 끝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데, 나 때문에 달리고 있다. 저 기사는 내가 어디서 내리는지 묻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의 제 귀는 정류장마다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안 내리십니까?" "어디까지 가시죠?" 저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답합니다. "종점(終點)요." 입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을 소리를, 기사는 용케 알아듣고 맞받습니다. "아, 좋은 데 사시는군요. 그런데 날마다 힘드시겠어요." 말투가 묘합니다. 위로인가 하면 동정입니다.

 아침저녁 먼 길을 달려야 하는 승객의 처지가 딱하다는 뉘앙스입니다. 아니, 고마움의 표시인지도 모릅니다. '당신 같은 사람' 덕분에, 이 버스노선이 살아있고 자신도 먹고 사는 거 아니겠느냐는! 그러나 고맙기로 말하자면, 이쪽입니다. 이 비좁고 어두운 길을, 밤낮으로 묵묵히 드나드는 버스가 백배 더 고맙지요.

 지금 제 심정이 그렇게 '반반'입니다. 미안함 반, 고마움 반. 이 축제 마당이 혼자 타고 가는 막차처럼 편치 않습니다. 책방주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저를 따라 움직이는 것만 같아 거북합니다. 주인들은, 예상했지만 예상이 적중했다는 것이 여간 실망스럽지 않은 눈빛입니다. 손님 없는 것이 제 잘못처럼 미안해집니다.

 손님보다 종업원이 더 많은 옷가게에 들어온 느낌입니다. 손님 하나를 서너 명이 에워싸며 반기는데, 어떻게 홱 돌아서 나오겠습니까. 그렇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이것저것 사들고 나올 수도 없지요. 어서 다른 손님들이 와서 제 한 몸이 받고 있는 시선과 관심을 흩어놓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광화문이나 청계천 책방들이 이제 다리 밑까지 밀려 왔구나. 더 밀려난다면? '메콩 강' 수상가옥들처럼 강물에 둥둥 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는 지금 잔치판에서 너무 못된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공연히 센티멘털해진 것 같습니다. 감상(感傷)이 도를 넘었습니다.

 '다리 밑 헌책방 축제.' '다리 밑'이란 말에 붙잡혔던 모양입니다. 그 옛날, 집도 절도 없던 사람들의 거처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침침하고 축축한, 음험하고 냄새나는, 무섭고 쓸쓸한 곳. '다리 밑'과 '헌책방'이란 말들이 어깨동무를 한 모습에서 피난시절 부산 영도다리 풍경까지 연상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의 여름 다리 밑 풍경은 아주 다르지요. 강바람을 맞으러 나온 가족들과 연인들로 북적입니다. 도시에서는 제일가는 피서지입니다. 오뉴월 염천(炎天)에 이만한 명당도 드물지요. 돗자리 하나 펴고 누우면, 해변과 계곡으로 떠난 사람들이 부러울 것 없습니다. 지금 여기엔 책방들까지 따라와 모여 있으니, 금상첨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축제 주최 측 예상은 확실히 빗나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무더위를 피해 나온 시민들이, 강변에 들어선 '책의 숲'을 무척이나 반길 것이라는 생각. 치킨이나 피자를 먹으며 아이들은 동화책을, 엄마아빠는 소설을 읽을 것이라는 소망. 집으로 돌아가는 손에는 책 한 권씩 들리게 될 것이란 기대.

 너무 낭만적인 설계였습니다. 조금 더 정밀한 계산과 시뮬레이션이 필요했지요. 전시에 기교를 부려야 했고, 책과 예상고객의 거리를 좁혀줄 아이디어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곳저곳 책방들이 그저, '한자리에 모이는 것만으로도 축제'일 수 있다는 꿈은 너무 순진했습니다. 구슬을 쌓아놓기만 할 게 아니라, 꿰어야 했었지요.

 물론, 책의 먼지를 털고 보듬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그런 까닭에 누구든 나서서 도울 일입니다. 책의 운명을 아는 사람, 마케팅과 광고 홍보를 아는 사람, 젊은 전시기획자, 이벤트 전문가…. 헌책방을 돕는 일은, 우리 사회 문화 양면에 참으로 가치 있는 의제(agenda)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헌책방은 낡은 책 가게가 아니라, 사설 도서관입니다. 먼지 나는 책들의 집합처가 아니라, 개인 박물관입니다. 인사동 '통문관(通文館)'이 그런 곳이지요. 거기서 학자가 몇이 나오고, 얼마나 많은 '서지(書誌)전문가', '고서(古書)감식가'가 나왔습니까. 그 정신의 곳간에서 얼마나 빛나는 논문과 명저가 태어났습니까.

 눈 밝은 이들이 그런 곳의 사서(司書)가 되어주고, 큐레이터가 되어주면 좋을 것입니다. 생각은 '대한해협'을 건너갑니다. 동경 '간다(神田)' 헌책방 거리에 가 닿습니다. 건물마다 고서점, 가게마다 취급분야가 다릅니다. 어느 집은 역사, 어느 집은 경제, 또 어느 집은 과학서적을 다룹니다. 점포마다 전문도서관입니다.

 거리 전체가 책의 도시, 책의 장수촌입니다. 날마다 '헌책 축제'입니다. 여기서는 헌책방 주인과 손님 어느 쪽도, 막차를 타고 가는 사람처럼 쓸쓸해 보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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