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뉴욕 김근철 특파원] 얼마 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근처에서 점심 약속이 있었다. 맨해튼 일대의 악명 높은 도로 정체를 감안해 뉴욕 지하철을 이용해 약속 장소로 가기로 했다. 시내의 한 지하철역에서 북적대던 인파들과 함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향하는 C 노선 지하철 차량에 허겁지겁 올랐다.
출입문 근처에 서 있을 공간을 확보하고 손잡이를 잡으려 고개를 드는데 한 여성의 강렬한 눈빛과 마주쳤다. 사람도 아닌 지하철에 붙은 광고 사진 속의 여성인데도 그 눈매는 섬뜩할 정도로 강했다.
자세히 보니 광고 속 사진의 여성은 머리에 검은 히잡을 쓰고 있었다. 뉴욕 지하철에서도 무슬림 여성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당당히 히잡을 쓸 권리가 있으며 이로 인해 차별받아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셈이다.
뉴욕시는 최근 이 같은 공익 광고를 지하철 차량 곳곳에 게재하고 있다. 빌 드 블라지오 뉴욕 시장과 뉴욕인권위원회의 합작품이다. 다른 종류의 사진과 광고문도 몇 가지 더 추가됐다. "나는 당연히 권리를 갖고 있다. 내 피부색이나 이름으로 인해 거부당하지 않고 나의 직업을 구할 수 있는" "나는 당연히 권리를 갖고 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지 않고 내 선조들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등이다.
반면 최근엔 무슬림권의 히잡 착용이 당당한 권리라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히잡에 대한 공격과 착용 금지가 개인의 신앙은 물론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차별이자 인권유린이란 논리로 맞선다.
히잡 착용 자체에 대해 일방적인 답을 찾는 것은 무리다. 여성 인권에 대한 억압이란 측면과 서구의 편견에 맞선 당당한 권리라는 이중성이 엄연히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뉴욕의 지하철 히잡 광고를 통해 확인해야 할 메시지는 분명하다. 종교와 인종, 관습이 다를 순 있어도 그로 인해 차별과 공격의 빌미가 돼선 안 된다는 점이다.
뉴욕 지하철의 공익광고 캠페인을 주도한 캐멜린 맬라리스 뉴욕인권위원회 위원장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광고 캠페인은 지난해 미국 대선 과정에서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외국인 혐오주의를 다시 생각해보려고 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뉴욕인권위원회에 접수된 차별 범죄 접수 건수는 지난해부터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뉴욕시의 이 같은 캠페인에 공감하는 미국인들은 여전히 많은 것 같다. 지난 2일 래첼 맥라이트라는 여배우는 지하철 C 노선 차량 안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려 화제가 됐다.
사진에는 무슬림 소녀와 그 가족들이 갓난 아이를 안은 옆자리 백인 여성을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담겼다. 네티즌들은 "이것이야말로 미국을 위대하게 하는 모습"이라며 적극적으로 공감을 표시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는 미국인들에게 '미국다운 모습'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던져 놓고 있는 셈이다.
뉴욕 김근철 특파원 kckim100@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