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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44]게스트하우스를 나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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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일로, 한 달 열흘쯤을 낯선 동네에서 보냈습니다. 외국은 물론 아니고 제주도나 설악산도 아닙니다. 여전한 '서울 살이'입니다. 집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지요. 지하철도 같은 역을 이용했고, 일터로 가는 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게스트 하우스에서 눈부신 계절을 조금 어둡게 보냈습니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 실감했습니다. 벚꽃이 눈송이처럼 날리는 언덕에서 집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숨겼습니다. 놀이터 아이들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적함을 달래주었습니다. 가난하던 시절, 어른들이 골목 가득 모여 노는 우리를 보고 미소 짓던 이유를 짚어보았습니다. 모내기를 마친 논을 바라보는 농부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방이 따뜻해서, 구겨지고 오그라지는 몸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심하게 다리를 저는 식탁을 살살 구슬려가며 썼습니다. 세탁기가 없어서 손빨래를 했습니다. 덕분에, 손목과 손아귀에 제법 힘이 붙었습니다. '반 지하'집이라서 햇빛 한줌 들지 않았습니다. 시간 가늠이 어려웠지만, 장단점도 반반이었습니다.

 불을 끄고 누우면 정말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서 숙면을 할 수 있었지요. 자칫하면 해가 중천에 떠도 모르고 자다가, 화들짝 놀라 깨기 일쑤였습니다. 날이 흐렸는지 비가 내리는지 실내에선 도통 알 수가 없는 것이 흠이었습니다. 지각하기 딱 좋은 방이었지요. 몇 번인가 늦잠을 자서 허둥거렸습니다.

 아무튼, 태양도 나 몰라라 하고 지나쳐가는 방에서 사십일을 묵었습니다. 드디어 돌아가는 날입니다. 후미진 골목 여관을 나서는 장기투숙자처럼, 묘한 기분이 듭니다. 귀향하는 부랑자처럼, 감정도 퍽 복잡해집니다. 피난살이를 청산하는 기분과 그새 익숙해진 것들을 떼어놓아야 하는 서운함.
 광고 카피 한 줄이 떠오릅니다. "집 생각이 나면 실패한 여행이다." 동시에, 뜬금없는 생각이 꼬리를 뭅니다. "그렇다, 이것도 여행이다. 그런데 하루도 집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게스트하우스가 비웃듯이 묻습니다. "밤늦게 돌아와 잠이나 자는 주제에! 집이나 여기나 마찬가지 아닌가?"

 할 말 없습니다. 사실이니까요. 저는 집에 와서 잠이나 자던 사람입니다. 눈 뜨고 살아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다른 도시에 가서 지내지요. 물론, 그것이 어디 저만의 이야기겠습니까. 요즘 세상에 누가 밤낮으로 집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문전옥답을 지닌 농부? 살림집이 딸린 상점주인? 산지기나 재택근무자? 전업 작가?

 '내가 사는 곳'이란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아래와 같은 의문에서 일으킨 생각입니다. "잠만 자는 곳이 '어디 사느냐'는 물음에 답이 될 수 있는가? 인천에서 4시간 동안 잠을 자고 서울로 돌아와 20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과연 인천에 산다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면 인천이 웃지 않을까."

 누가 나더러 어디 사느냐 물으면, 일산 산다고 답하는데,/그러면 일산이 웃는다//"너는 일산 사람이 아니지/너는 막차를 타고 와서 새벽이면 나가버리는/나그네지//일산 사람은/일산에 뜨고 지는 해를 빠짐없이 바라보고/일산에 내리는 눈비를 다 맞지/토박이 풀과 별의 내력을 알고/뜨내기 바람과 구름을 가려내지/무슨 일로 야반도주를 하다가도/동틀녘이면 돌아오지/목을 매달아도 아는 나무에 매달자고/울면서 돌아오지//저기 저 사람을 보게나,/선산도 공원묘지도 마다하고/이제는 묵밭 쑥밭이 되어버린/마늘밭에 묻힌 사람,/제 손으로 갈고 엎던 밭이랑을 베고 누운 사람,/목이 마르면, 한밤중에도 옛집까지 기어가서/살아서 먹던 물을 핥고 오는 사람//저쯤 되어야 여기 사람이지"//내가 사는 곳은 어디인가.//

 우리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 조병화 시인은 '가숙(假宿)'이란 표현으로 세상에 '정해진 자리 없음'을 설명했지요. '가짜 숙소'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집이라 믿는 곳은 '그저 거쳐 가는 임시주거'에 불과하다고, 그는 썼습니다. "나는 집이 없는 사람입니다. 있다면 당신의 '사랑'이 지금 내가 기거하고 있는 내 '존재의 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의 집'이라는 시인의 말이 퍽이나 뜨겁게 읽힙니다. 몸을 누인 곳은 '임시'지만, 사랑은 언제까지나 변함없을 마음의 울타리인 까닭입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정말 딱한 사람이거나, 떠돌이 수도승처럼 모진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 이름은 어떤 집보다 믿음직한 주소입니다.

 이제 게스트하우스를 떠납니다. 더 오랜 정이 든 동네로 돌아갑니다. 더 오래 머물 곳으로 옮겨갑니다. 그곳 또한 언젠가는 비워주어야 할 처소입니다. 도연명(陶淵明)이 세상을 뜨며 남긴 시에, 이승의 집을 '여관'이라 쓴 이유를 새겨봅니다. "여관을 떠나 영원히 본래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다.(將辭逆旅之館 永歸於本宅)"

 도연명과 조병화 시인은 벌써 도착해 살고 있을 본댁(本宅)을 찾을 때까지, 저는 몇 군데의 게스트하우스를 더 들러야 할까요. 일생동안 필요한 지상의 방은 몇 개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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