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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 안다미로 듣는 비는/오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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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마 맡에 널어 말린 동지(冬至)께 무청처럼 간조롱히 뿌리는 비는
 한 치 두 치 나비 재며 한 냥쭝 두 냥쭝 저울에 달며 는실난실 날리는 비는

 일껏 발품이나 팔며 그늘마다 구름 기슭 볕뉘처럼 움트는 비는

 전당포(典當鋪)도 못 가 본 백통(白銅) 비녀 때깔로 새들새들 저무는 비는
 꺼병아 꺼병아 애꾸눈서껀 엿장수서껀 칠삭둥이서껀

 안다미로 눈칫밥만 멕이다가 나무거울로 낯짝 가리고 내리는 비는

■'께'는 '그때쯤'이라는 뜻이고, '무청'은 당연히 알겠고, '간조롱히'는 '가지런히'라는 말이다. '쭝'은 '무게'라는 의미의 접사고, '는실난실'은 사전에는 '성적 충동으로 인해 야릇하고 잡스럽게 구는 모양'이라고 적혀 있긴 한데 그보다는 앞서 자리 잡고 있는 '나비'를 따라 읽어 보면 어떨까 싶다. '볕뉘'는 '작은 틈이나 그늘진 곳에 잠시 비치는 볕'이고, '새들새들'은 '조금 시들어 힘이 없는 모양'을 그린 말이다. '꺼병이'는 원래 '꿩의 어린 새끼'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옷차림 따위의 겉모습이 잘 어울리지 않고 거칠게 생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서껀'은 '무엇이랑 함께'라는 뜻을 지닌 조사이고, '안다미로'는 '담은 것이 그릇에 넘치도록 많이'라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나무거울'은 '겉모양은 그럴듯하나 실제로는 아무 쓸모도 없는 사람이나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그냥 '나무로 만든 거울'이나 '나무'로 여겨도 재미있겠다 싶다. 이렇게 찾아 놓고 읽어 보니까 어떤가. 저 봄비가 그저 주룩주룩 내리지 않고 "간조롱히" "는실난실" "새들새들" "안다미로" 내리지 않는가. 가끔 조금만 수고를 보태면 환해지는 시가 있다. 이 시가 그렇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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