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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36] 해방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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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을 나와서 길 하나 건너면 이곳입니다. 오래된 동네지요. 단골로 다니는 주점도 있고 즐겨 찾는 상점도 두어군데 있어서 자주 드나듭니다. 엇비슷한 모습의 붉은 벽돌집들이 크고 작은 골목을 거느린 언덕이지요. 고개를 들면 서울타워가 똑바로 올려다 보이는, 이 산자락을 사람들은 해방촌이라고 부릅니다.

 이른바 '해방공간'에 생긴 이름일 것입니다. 8.15에서 6.25로 이어지는 혼란과 격동의 시기지요. 오갈 데 없던 도시 빈민들과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각처의 피난민들이 이리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곤 겨우 비바람이나 가려질 만큼 엉성한 지붕들을 이고 살았지요. 생존의 벼랑에서 위태롭게들 살았습니다.
 이범선의 소설 '오발탄(誤發彈)'에 나오는 동네입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 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모양 깔렸다."

 1959년에 발표된 작품이니, 육십여 년 전 풍경입니다. 그 시절 생활상이 세밀화처럼 들여다보입니다. 이태 뒤에 유현목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었지요. '한국영화사'에서도 손꼽히는 명편입니다. 영상자료원이 골라놓은 '꼭 봐야 할 우리 영화 백 편'에서도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합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36] 해방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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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본은 잃어버렸다지요. 제가 본 영상도, 해외영화제 출품을 위해 영어 자막을 얹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낡은 흑백영화가 전혀 촌스럽거나 지루하지 않은 까닭은 치밀한 연출 덕분일 것입니다. '미장센'의 힘이라 해도 좋겠지요. 등장인물과 배경요소들이 완벽하게 한 덩어리로 어울립니다.

 스크린에 비친 남대문과 명동거리, 오래된 상표와 광고판들에 정범태, 최민식 같은 리얼리스트들이 찍은 전후(戰後) 서울의 풍경사진들이 겹쳐집니다. 가난에 짓눌린 인간군상이야 연민스럽기 짝이 없지요. 그 눈물겨운 장면들에서 우리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확인합니다. 이 언덕의 정경이 특히 그렇습니다.
 '해방촌'을 옮겨놓은 영어 자막이 눈에 거슬립니다. 'Liberty village'. 제게는 '자유의 마을' 쯤으로 읽혔습니다. '리버티?' 영화 속 그 마을에는 없습니다. 먹고 입을 것조차 없는 이들에게 '자유'는 허구의 개념입니다. 속박과 억압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당연히, 해방촌은 해방된 마을이 아니었지요.

 '오발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해방촌을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실성한 노모(老母)는 밤낮으로 '가자, 가자'고 외칩니다. 그녀가 꿈꾸는 곳은 잃어버린 고향이지요. 제대군인은 권총을 들고 은행으로 달려가고, 여동생은 밤거리를 헤매 돕니다. '부자유(不自由)'의 울타리를 넘어가려는 탈출의 몸부림입니다.

 소설 속의 은행 강도, 영호는 소심하고 고지식한 형 철호에게 이렇게 대듭니다. "양심이란 손끝의 가시입니다. 빼어버리면 아무렇지도 않은데 공연히 그냥 두고 건드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거야요." "남들은 다 벗어 던지구 '법률선(線)'까지 넘나들면서 사는데, 왜 우리만이 옹색한 양심의 울타리 안에서 숨이 막혀야 해요?"

 그렇다면 세상은 두 군데로 나뉩니다. 해방된 곳과 아직 해방되지 않은 곳. 물론 그것은 지리적 구분이 아니지요. 심리적 영토의 양분(兩分)입니다. 해방촌은 사회적 귀천이나 물리적 빈부를 넘은 개념이어야겠지요. 정신과 영혼이 평화로이 쉴 수 있는 곳, 적어도 잠깐 머물다 지나는 정거장은 아닐 것입니다.

 주막에 앉아, '오발탄'이란 단어를 되뇌어봅니다. 실종된 양심과 윤리, 혼탁한 관습과 법률에 치어 목표와 궤도를 잃은 청년들을 생각합니다. 술집과 카페마다 웃고 떠드는 소리 가득한 밤입니다. 건물들 사이로 막 불이 켜지는 옥탑방이 보입니다. 옆 건물 옥상엔 고양이 한 마리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발탄'의 해방촌에 오늘의 해방촌이 포개집니다. 여기가 무언가를 포기하고 망각해버리는 젊음의 특구나 현실도피의 해방구(解放區)는 아닐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소망합니다. 누추하고 비루했던 시간의 흔적과 구조물들이 그저 소모적인 청춘의 놀이터가 아니라 꿈꾸는 이들의 전진기지이기를.

 진짜 해방촌은 허위와 가식, 인습과 타성, 불의와 협잡, 부당함과 부조리가 없는 곳. 그런 곳이라면 사랑도 인심도 금세 변치 않을 것입니다. 골목마다 진격의 아지트들이 빼곡하고, 비로소 제 과녁을 찾은 오발탄들이 분명한 목표를 향해 날아갈 준비로 날마다 부산할 것입니다.

 제 방식으로 기도하고 싶습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원해주십시오. 올봄에는, 골목에도 광장에도 해방의 긍정적 가치가 넘쳐나기를. 해방촌이 특정지역의 지명을 넘어 '자유의지'로 충만한 모든 장소를 일컫게 되기를. 나아가, 다음과 같은 의미로 확장되기를. "여기를 두고 어딜 가랴. 영원히 머물고 싶은 인간의 마을, 해방촌."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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