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딛고 사는 세상이 악의 지뢰밭 같긴 하지만, 아예 '이길 수 없다'고 단정짓는 표현에는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그야말로 '답답한' 영화다. 늙은 목수 다니엘 블레이크는 심장 질환을 갖고 있는데, 예민한 관객이라면 그 역시 심장이 옥죄는 듯한 갑갑함을 느낄 것이다.
영화는 다니엘 블레이크의 선함을 여러 방식으로 입증해 보인다. 그러면서 선하되 늙고 병든 자가 요구하는 당연한 권리가 그토록 뭉개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거장'으로 불리는 80세 노감독 켄 로치의 위대함은 단순해보이거나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스토리에 천근만근 묵직함을 불어넣는다. 현실은 동화책과 달라서 선이 악을 이기지 못할 때도 많다.
며칠 전 아이가 잘 놀다가 느닷없이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질을 하고 있던 내 옆자리로 찾아 들었다. 울 듯 말 듯 묘한 표정이었다. "뭐야, 왜 갑자기 왔어?" 물어도 대꾸하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쓴다. 결국은 제 엄마한테 가더니 '오열'을 한다. "엄마, '햄버거'가 자꾸 생각나. 너무 보고 싶어"라며. '햄버거'는 잠깐 키우다가 일찍 죽고 만 햄스터 이름이다. 1년이 훌쩍 지난 일이고 평소엔 잘 얘기도 않았었는데, 마음 속 한 켠에는 슬픔이 오롯했었나보다.
정의와 불의라고 바꿔서 표현하는 게 좀 더 익숙하겠다. 광장을 뒤덮은 촛불은 상식의 잣대로 불의를 보고 분노하고 주권자로서 권리를 행사하려는 저항의 몸짓이다. 변두리 불의가 아니라 대명천지에 국가의 중추에 대놓고 자리잡은 불의에 경악해서다. 제대로 단죄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다시 '나쁜놈들 전성시대' 아닐까.
박철응 금융부 차장 he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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