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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30] 새우소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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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에서 우동을 먹고 있는데, 문득 한 소녀가 생각났습니다. 뜬금없이 떠올랐습니다. 저와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만난 적도 없는 여자애입니다. 가까이 모시는 어른께 들은 이야기의 주인공일 뿐입니다. 어른께서 팔십이 넘으셨으니 그녀도 그럴 것입니다.

무엇이 그녀를 생각나게 했을까요. 우동에 든 새우튀김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만치에 놓인 TV 뉴스화면에 비치는 얼굴들이었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 삼척동자도 아는 일을 끝끝내 '모른다' 하고, 증거가 즐비한데 한사코 '아니다' 우기는 이들 말입니다.
어른께 들은 이야기. "부산 피난 시절이었어. 그녀는 포장마차로 생계를 꾸리는 소녀가장이었지. 많은 남학생들이 흘끔대며 지나다닐 만큼 예뻤어. 어느 날, 그 애한테 새우튀김 하나를 사먹게 되었지. 그런데 맛이 영 수상쩍더라고. 재료가 신선하질 않았던 거야.

입에 넣었던 튀김을 뱉으며, 버럭 소리를 질렀지. '야, 이거 상했잖아!' 잔뜩 인상을 쓰고 눈을 부라리면서. 그 애는 겁에 질려 말도 못하고 오들오들 떨기만 하더군. 나는 더 기세등등해져서 언성을 높였지. '상한 것 맞지? 이런 걸 어떻게 팔 생각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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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그 시절 음식장사들은 대개들 이렇게 나왔지. '무슨 소리요? 여태 아무 일 없었는데. 돈 안 받을 테니 썩 가시오.' 그런데 얘는 고개도 못 들고, 그저 좌불안석이야. 눈망울엔 눈물이 그렁그렁 열리고. 내 말이 옳다는 거지. 잘못을 안다는 거지. 아니나 다를까, 순순히 인정하더군. '네…'
기어들어가는 소리였지만, 발음은 또렷했어. 그런데 이상하지. 오히려 내가 당혹스러워지더군. 금세 물렁물렁해졌어. 한껏 치밀었던 분노가 순식간에 사라지더라고. 탁자라도 내려치려고 움켜쥐었던 주먹은 스르르 풀리고.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대신하는 한 마디를 들은 적이 없어.

'맞아요, 새우는 상했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오죽하면 그랬겠어요.' '이해해주세요.' '용서해주세요.' … 한 글자가 그렇게 많은 말들을 품고 있었던 거지. 말의 힘? 아니야. 그것은 '진실의 힘', '고백의 힘'이지.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어. 순순히 튀김 값을 내고 슬그머니 뒷걸음쳐 나왔지.

그게 끝이야. 그 뒤로는 포장마차도 여학생도 볼 수가 없었어. 어쩌면 내가 그 애를 볼 용기가 없었는지도 몰라. 한동안 그 길로 다니질 않았으니까. 요즘도 가끔 그 얼굴 그 표정이 떠올라. '새우소녀'. 이름도 성도 모르니까, 그냥 내가 그렇게 지어서 부르는 거야. 에이, 싱거운 이야기 또 했군."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실 때, 이 분의 표정은 결코 싱겁지 않습니다. 느릿하지만 묵직한 어조(語調)에서 아련한 향수가 느껴지고, 첫사랑에 대한 미련처럼 아쉬움이 묻어납니다. 그래서 모종의 호기심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어쩌면 소설 '소나기' 같은 '기-승-전-결'이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새우소녀가 '네…!'라고 말하는 대목은 영화의 한 장면을 닮았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를 평화로 바꾸는 돌연한 반전(反轉)의 '컷'입니다. 이쪽이 아무리 감정을 증폭시켜보아야 저쪽은 아무런 응전(應戰)의 의사가 없다는 표시입니다. 조건 없는 투항입니다. 단두대에, 죄인 스스로 목을 들이미는 형국입니다.

물론 그렇게 잘못을 인정했다고 해서 상한 새우가 신선한 상태로 되돌려지진 않습니다. 그러나 손님의 상한 마음은 어느 정도 돌아섭니다. 호되게 물리려던 죄(罪)값에서 얼마쯤은 에누리를 하게 됩니다. 형편없이 후려치려던 사람값도 아주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은 면하게 합니다.

이 사람 역시 누군가의 자식이고 부모임을 생각하게 되면 더 그렇습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요즘 우리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도 자식 눈치는 보더군요. 어떤 어미는 수의(囚衣) 입은 모습을 아들이 볼까 전전긍긍한다고 들었습니다. 더 큰 죄인 한 사람은 딸 얘기만 나오면 눈물부터 흘린다는 기사도 읽었습니다.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당신들 자식의 눈만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TV만 켜면 나오는 당신들 얼굴을 온 나라 아이들이 보고 있다. 당신들의 거짓말은 이 땅의 모든 아이들 여린 가슴에 생채기를 내고 있다. 당신들이 '예'라고 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은 거짓말 하는 어른들의 나라가 되고 있다."

죽는 날까지 반성과 회한(悔恨)이 많았을 사람, 춘원 이광수(李光洙)의 문장 하나가 의미심장하게 떠오릅니다. "나의 가장 심각한 '참회(懺悔)'는 어린 자식이 아픈 것을 볼 때에 온다." 당신들이 이제라도 '새우소녀'처럼 '예'라고 말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당신의 아이가 더 아파하고,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 더 아파지기 전에.

할머니가 되었을 '새우소녀'도 그 한 마디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네…."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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