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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훈의 돛단Book]냉전과 열정 사이, 루마니아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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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플란 著 '유럽의 그림자'

30년만에 다시 찾은 루마니아 여행기
신냉전시대, 강대국 사이 고군분투
민주주의 향한 열망·전통 살리라 주문
한국과 역사·민족성 닮아…비교 재미 쏠쏠


1981년 이스라엘 예루살렘,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거리를 땀 범벅이 된 채 헤매는 한 남자가 있다. 미국 출신 유대인으로 곧 서른을 앞둔 그는 이스라엘 방위군에 입대했다가 이제 곧 제대를 앞둔 처지였다. 성공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나 방법을 모르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그 역시 중동 지역 취재와 군복무로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마땅한 성과물이 없는 자신의 처지에 고심하던 차였다. 그는 늦여름의 거리를 서성이다 들른 낡은 중고서점에서 그야말로 '인생의 책'을 만나게 된다. 체코슬라바키아의 20세기 역사를 다룬 '동유럽 공산정권(고든 스킬링 저)'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남자는 10년전인 1971년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를 석달동안 여행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당시 그는 그저 소련의 위성국가인 줄 알았던 폴란드, 체코슬라바키아, 동독,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실은 제각기 개성을 지녔다고 느꼈다. 통치방식이나 문화도, 소련과의 공생 전략도 모두 달랐다. 그러나 동유럽은 여전히 서방의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남자는 발칸반도 공산국가들이 가진 세세한 차이점을 취재한 기록을 신문사에 팔아 경력을 쌓기로 결심한다. 그는 제대한 다음날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슈티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젊은 시절의 바람대로 훗날 세계적인 저널리스트가 된 이 청년의 이름은 로버트 카플란. 최근 국내 출간된 그의 저서 '유럽의 그림자'는 1980년대 청년기에 여행했던 루마니아를 2013년 환갑을 앞둔 나이에 다시 찾아가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책이다. 80년대 루마니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 취재는 그에게 적지 않은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중동과 발칸 일대 국가를 취재하며 여러 권의 책을 썼고, 미국 정부의 자문으로 활약하며 미군의 이라크 공격에 조언을 하기도 했다. 빌 게이츠나 버락 오바마와 함께 잡지 '포린 폴리시'가 선정한 '세계 100대 사상가' 명단에 두 번이나 이름이 올랐다.

그가 다시 루마니아로 향한 이유는 세계가 다시금 신냉전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신냉전 시대의 주요 갈등 요소는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제'다. 러시아는 가스 공급용 파이프라인을 확장하며 주변 국가들과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다. 미국 역시 서유럽을 상대로 무역전쟁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신냉전 구도속에 재정적 위기로 혼돈에 싸인 유럽 국가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합집산을 계속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발칸반도, 그중에서도 루마니아는 다시금 지정학적인 이유로 고초를 겪을지 모른다.
천년 가까운 세월을 지나며 루마니아는 유럽의 음지 국가로 존재했다.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제국, 러시아 제국의 국경에 편입되며 난도질된 나라다. 중유럽과 동유럽의 사이에 위치해 강대국들이 정벌을 위해 들락거리는 통로국가이기도 했다. 외세의 개입으로 인한 협상과 투쟁은 이 나라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야 하는 일'로 여겨졌다. 게다가 히틀러와 스탈린에 교대로 굽신댔던 이온 안토네스쿠 같은 불안한 지도자가 수없이 많았다. 이것이 로버트 카플란이 30년의 세월을 넘어 루마니아를 재방문한 이유다. 루마니아를 서방세계에 알리고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로버트 카플란이 본 80년대 공산정권하의 루마니아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북한 김일성의 독재 시스템을 자국 통치의 교본으로 삼은 차우셰스쿠로 인해 국민들의 삶은 나날이 피폐해졌다. 빵집에서 일부러 빵을 만들고 나서 하루 묵혔다 판다는 소문이 돌았다. 맛이 없는 빵을 만들면 아무래도 사는 사람이 적지 않겠느냐는 이유에서다. 차우셰스쿠가 1989년 12월 25일 성탄절에 혁명군의 총탄 세례에 쓰러질 때까지 이런 상황은 계속됐다.

독재자는 심지어 민족이 애써 기른 자연, 문화적 유산까지 파괴했다. 그리스 정교 성당과 수도원, 19세기 주택을 부순 자리에 '스탈린'풍의 커다란 관청과 밋밋한 블록형 아파트를 지었다. 루마니아인들은 이같은 만행을 '차우시마'라고 불렀다. 차우셰스쿠와 원자폭탄 투하로 폐허가 된 일본 히로시마를 합친 말이었다. 하지만 루마니아인들은 고난을 묵묵히 견뎠다. 저자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문화유산을 축적했던 루마니아가 언제나 희망이라는 씨앗을 품고 있었다고 말한다.

약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찾은 루마니아는 공산주의 독재자들이 수십년간 파괴한 공간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중이었다. 죽은 자들을 기리는 종교 시설이 다시 문을 열었고 카지노와 클럽이 들어섰다. 1980년대 손님 테이블 옆 얼음통에 가래침을 뱉던 종업원은 간 데 없었다. 부자연스러운 신문물이 마구잡이로 생겨나고 있었다. 서유럽풍의 잡종 문화가 들이닥친 부쿠레슈티의 거리에서 저자는 1930년대 전간기(1,2차대전 사이 20년)의 화려한 혼돈을 떠올린다. 과거의 교훈보다 새로운 것만 찾는 위험한 태도가 대도시에 팽배했다.

어찌됐든 루마니아인의 시선이 다시금 서유럽을 향하는 것은 분명하다. 통합된 유럽은 루마니아인들에게 '국민을 주권적 개인으로 보호해주는 근대국가'를 의미한다. 발전의 힌트를 서유럽 민주세계에서 얻고자 하는 국민의 열정이 있다. 저자는 서구 민주주의 세계가 루마니아를 경계심 없이 대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서유럽의 국가들이 이렇듯 열정 가득한 루마니아를 포용해야 한다는 의미다. 반면 루마니아인에게는 진짜 근대화, 진짜 자유화를 위해 성스러운 전통으로 회귀하라고 주문한다. '눈'은 현대화된 서유럽에 두지만 '뜨거운 심장'은 근대의 고유한 전통에 두자는 의미다.

한편 책 곳곳에서 루마니아와 우리나라의 유사점이 보인다. 이 책을 번역한 신윤진은 역자 후기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촛불시위가 한창인 때에, 루마니아 국민들도 자국의 부패 정권을 규탄하기 위해 부쿠레슈티 광장에 모인 모습을 보며 반가워서 눈물이 났다"고 썼다. 이런 정치적인 면 외에도 소위 '끼어있는 나라'로 겪어야 했던 역사적 비극, 문화 개방에 적극적이면서도 난민이나 타인종을 멀리 하는 모순적 태도가 상당히 비슷하다. 두 나라를 비교해 가며 읽는다면 더 흥미로운 독서가 될 것이다.

더불어 실제로 루마니아를 여행할 계획이 있는 이들에게도 추천할만하다. 저자는 루마니아 곳곳의 유적을 돌아보며 이 나라 역사에 영향을 주었던 라틴문화의 기원을 추적한다. 블라드 체페슈 드라큘라('용의 아들'이란 의미, 흡혈귀 전설의 기원이 된 인물)와 튀르크족의 투쟁사를 읊기도 한다. 대평원 '바라간 스텝'을 지나며 이곳에 유배됐던 민초들을 기리고 기독교 정교 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고즈넉한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여정 곳곳에 저자의 문학과 역사에 대한 풍성한 식견이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SNS에 올릴 고성이나 맛집 음식의 사진을 찍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속에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떠나는 여행객이라면 (다소 무겁긴 하지만) 짐 속에 한 권 챙겨가는 것도 좋겠다.

(로버트 D. 카플란 지음, 신윤진 옮김/ 글누림/2만8000원)





박충훈 기자 parkjov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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