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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문화 프리즘]김은진 개인전 '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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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진, Public B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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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진은 2017년 8월20일부터 아흐레 동안 아나톨리아의 서쪽 절반을 여행했다. 건조한 밀밭이 끝없이 펼쳐진 고원을 가로지를 때나 올리브 숲을 지날 때나 그는 한결같았다. 나른한 시선으로 풍경과 각막 사이 어딘가, 진공 속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가 잠들었고 깨어나면 다시 그 시선으로 풍경과 대면했다. 그의 눈이 언제 번뜩였는지 나는 모른다. 나에게는 내가 바라보는 나의 풍경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뜨거운 바위에 올라 똬리를 틀고 햇볕을 흡수하는 파충류와도 같았다. 그래서 나중에 그의 소셜미디어서비스(SNS)에서 이런 멘션을 발견했을 때 놀라거나 비웃지 못했다.
"지금은 북부 이탈리아에 있다. 파리의 대규모 회고전이니 베니스 비엔날레니 하는 직업적 핑계를 대고 왔지만, 사실 그리웠던 것은 뜨거운 햇볕과 오래된 벽돌들의 꾀죄죄한 얼룩과 신발 바닥을 뚫고 올라오는 바닥 타일의 감촉이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쪼그리고 앉아 햇볕에 등을 대주고 그렇게 내 피도 다시 데우고."

김은진, 냉장고(부분).

김은진, 냉장고(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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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에서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가 화가임을 알았다.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6개월 동안 장기 전시를 했다. 전시는 8월13일에 끝났고, 그는 그때 아마도 오랜 시간에 걸친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친한 대학선배가 안식년을 맞아 카파도키아에 있는 대학의 한국어학과로 간 데 자극받아 여름휴가를 그곳에서 보내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나의 행로는 흔하지 않은 인연으로 해서 아나톨리아의 고원을 가로지르는 길에 그의 행로와 교차한 것이다. 놀랍게도 나는 그를 보기만 하고도 국립현대미술관에 걸린 그의 그림을 선명히 떠올렸고, 이해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냉장고'라는, 16개월 동안 그린 대작(145㎝×560㎝)이다.

김은진은 2015년에 이르러 미술가로서 움직일 수 없는 위치를 확보하는 것 같다. 그는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이때 걸린 작품들은 압도적인 힘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뛰어난 평론가들이 김은진의 작품, 특히 냉장고에 대해 본격적으로 글을 썼고 이 과정에서 화가의 정체성은 구체적으로 윤곽을 드러낸다. 류병학은 '내가 보기에'라고 전제했지만 사실은 아주 강한 확신을 가지고 "그녀의 작품들은 늘 '죽음'이라는 주제를 관통하고 있다"고 짚어낸다. 그는 김은진의 '냉장고'를 제시하며 "히에로니무스의 '세속적 쾌락'을 냉장고로 전이시킨 것처럼 보인다. … 흥미진진한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모든 작품이 그렇겠지만 김은진의 작품은 직접 보아야만 한다"고 썼다.
죽음에 대한 체험 또는 예감은 김은진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이 공유하는 코드다. 김인선은 죽음을 주제로 작가와 긴 대화를 나눈 다음 "죽음에 대하여 집요하리만치 들여다보고, 상상하고, 떠올리며 자신의 화면을 채워나가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쓰기를 "화면에는 살과 피, 내장 등을 연상하게 하는 육(肉)적인 색채와 형상들로 가득한데, 이는 죽음과 삶에 대한 집착 등으로 뒤엉켜 있는 작가의 의식 속 풍경을 묘사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고 했다. 예민한 그의 촉수는 그래서 "죽음을 앞둔 누군가의 회고적 이야기 같기도 하고 또 한편 삶의 제한된 시간을 즐기고 누리고자 하는 강렬한 선언 같기도 하다는 어딘가 이중적인 느낌"을 감지해내는 것이다.

김은진, 벚꽃(부분).

김은진, 벚꽃(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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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로서 김은진의 선택은 냉장고를 공개하기 훨씬 전인 2011년 서울 현대16번지에서 '거기'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열 무렵 그가 쓴 '작가일기'를 읽어야 선명해진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삶을 조화롭게 만들어가는 일은 나에게 매우 혼란스럽고 버거운 삶의 무게가 된다. 개인으로서 나는 이상적인 삶의 모델과 거리가 먼 이기적이고 두려움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극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내 작업의 주요 모티브다. 종교적 아이콘, 그것과 대치되는 나의 유약하고 고단한 삶의 현상들을 화면에 대립시키거나 마구 섞어 재현함으로써 삶의 괴리감이 주는 고통을 객관화하려 한다. 이러한 노력은 구도(求道)의 방법이자 작업의 주제이다."

김은진은 10일부터 서울 을지로3가에 있는 상업화랑에서 전시회를 연다. 전시회 제목은 '벚꽃'이다. 진짜 벚꽃은 다 져버린 5월 중순에. 이번 전시는 그의 예술세계를 찬찬히 살펴볼 좋은 기회다. 냉장고가 인간의 욕망, 탐욕, 두려움, 생에 대한 집착, 거기에 대한 역겨움, 경의 등을 그렸다면 벚꽃은 우리가 타인에게 보이는 육체, 특히 건강하고 젊은 육체를 유지하는 데 들이는 개인적ㆍ사회적 대가와 그 애처로움을 말한다. 냉장고보다 조금 더 멀리 줌아웃해서 보는 풍경이다. 김은진은 젊음과 연애를 강요하는 사회와 그걸 이용해먹는 자본주의, 이용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을 그렸다고 한다.

"작업실 위층에 헬스장이 있는데 엄청 쾅쾅대면서 일 년 내내 운동을 하며 잉여 에너지를 불태우죠. 저럴 거면 차라리 먹지 말고 운동을 안 하면 되지 뭐 하러 저리 많이 먹고 남은 에너지 없앤다고 자기 몸을 저렇게 괴롭히고 왜곡할까, 뭐 이런 생각도 들었고요. 우리가 마치 사냥감 같다고도 생각했어요. 아이들 입시도 그렇고…. 미친 경쟁시켜서 누구 좋으라고 이렇게 힘들게 만드나. 아우, 인생 짧은데. 뭐 이런 생각을 하다 인생이 애처로워 '벚꽃'으로 콘셉트를 잡았습니다."

김은진은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고 뉴욕공대에서 커뮤니케이션 예술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국내외 개인전 7회, 그룹전 17회 등을 통해 작품세계를 알렸다. 남은 시간(2015), 거기(2011), 지독한 성스러움(2009), 나쁜 아이콘(2006), Healing(2003), Healing(1998이상개인전), 한국화의 재발견(2011), 핑크 시티 프로젝트(2011), 밈 트랙커, 아트인생 프로젝트, Over the Forrest(이상 2008), 모란(2007), 혼성풍전, 차도살인지계, 프리여성 비엔날레(이상 2006), 정물예찬, 어떤낯섦(이상 2004), 미술치료, 인간과 인형(이상 2003ㆍ단체전)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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