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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골목길]충무·을지로 '인쇄골목', 영화 포스터의 산실에서 '빈티지 데이트' 명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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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아시아경제 오성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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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박기, 말타기, 망까기…. 어린 시절 골목길은 정겨운 놀이터였습니다. 그러나 유래없이 빠른 산업화를 겪은 도심은 추억속 골목길을 하나 둘 밀어내고 말았죠. 오늘 본 거리의 풍경은 어제 그 거리와는 사뭇 다릅니다. 내로라하는 건물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던 공터에는 마천루가 생기기도 하니까요. 그렇다고 모든 것이 다 사라지거나 바뀌기만 하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삭막하기만 하던 골목길들은 새로운 시대의 유행과 옛 감성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입소문이 난 것인지 이런 곳은 이미 파란 눈의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인상적인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죠.

골목들은 그 지역이 가진 독특한 역사, 문화, 사회적 기능들은 대변하는 공간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특정 산업의 메카이거나 대규모 소비지, 관광지인 곳들부터 학생들과 청년들의 꿈이 응축된 골목들은 서로 다른 색깔을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골목길을 파고들다보면 우리네 삶, 나아가서는 우리 사회의 어제와 오늘, 내일과 마주하게 됩니다. 창간 30주년을 맞은 아시아경제가 '골목길'에 주목한 이유입니다. '한국의 골목길'은 텍스트와 영상이 결합된 융합 콘텐츠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단순히 특정 상권이나 핫스팟을 조명하는 기사가 아니라 골목길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쉼 없이 달려온 우리를 되돌아보고 내일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한국의 골목길'이 미시적인 골목의 모습에서 거시적 사회의 단면까지 비추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서울 중구 충무로 일대를 걷다보면 간판 한쪽에 한국영화 포스터를 내건 식당 간판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영화배우 최민식이 호리병을 손에 쥐고 지붕에 걸터앉은 장면이 인상적인 영화 '취화선'의 포스터는 순댓국집 간판에 붙어 있군요. 바로 옆 닭볶음탕집에는 영화 '쉬리'가 함께 합니다.

이런 간판들은 충무로가 과거 한국 영화의 메카였다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일종의 유물인 셈이죠. 그렇지만 한때 영화의 메카였던 충무로의 영광은 명보사거리를 바라보고 서 있는 '대종상 기념동상'을 통해 짐작만 해볼 수 있을 뿐입니다. 오히려 충무로의 과거 영광을 전혀 모르는 세대에게는 군부대라도 하나 있을 법한 동네 이름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충무로(忠武路)'란 지명도 그렇고 건너편 '을지로(乙支路)'도 모두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을지문덕 장군 이름에서 따왔기 때문입니다.
충무로 인쇄골목 인쇄소 모습

충무로 인쇄골목 인쇄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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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이 동네 골목을 대표하는 것은 장군들의 칼이나 한국영화가 아니라 '인쇄기'입니다. 을지로3가역에서 나오든 충무로역에서 나오든, 명보사거리 쪽으로 걸어오는 길에서는 골목 깊숙한 곳에서 전해지는 인쇄 잉크 냄새가 사방에 진동합니다. 골목길마다 자리잡은 인쇄소들이 새벽 댓바람부터 문을 열고 바쁘게 인쇄기를 돌리기 때문이죠. 충무로와 을지로에 산재한 이 인쇄골목에는 서울 인쇄업체의 67%에 달하는 5500여개의 인쇄소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 골목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처음 보는 풍경이란 인쇄기 돌아가는 모습, 인쇄 종이를 지게차가 하역하는 모습, 좁은 길을 오고가며 배달에 나서는 오토바이 모습들이 전부일 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다보니 조선시대부터 활자를 찍었던 동네로 오해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네요. 길 건너 필동이 또 '붓필(筆)'자를 쓰고 있는 터라 더욱 오해를 부르곤 합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전에는 인쇄랑 아무 상관도 없는 동네였습니다. 필동은 조선시대 한양성의 남부 관할 관청이 있던 자리라 '부동'이라 불렸고, 이후 붓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다가 조선시대 한 공무원이 붓동을 필동이라고 잘못 적어서 지금의 이름이 됐다고 합니다. 충무로의 한 행정동인 초동 역시 글자 그대로 풀(草)을 엮어다 바구니나 조릿대를 팔던 시장이 있어서 초전동이라 불리다가 초동이 됐습니다. 충무로의 '남산골 한옥마을'에 있는 고풍스런 한옥들은 조선시대 한옥의 모습들을 짐작케 해주고 있죠. 이곳은 서울시 민속자료 한옥 다섯채를 이전, 복원한 것으로 선조들의 삶을 알 수 있는 곳이자 시민들의 주요한 산책 공간으로 많은 이들이 찾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남산골 한옥마을 입구 모습

남산골 한옥마을 입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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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골목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라고 합니다. 1910년대 중반 이후 경성극장, 낭화관, 조일좌, 중앙관 등 영화관들이 을지로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영화 포스터와 전단지를 인쇄하기 위해 인쇄소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인쇄골목이 자리잡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다보니 을지로 인쇄소 앞에서는 백발이 성성한 주인장이 아직도 "하리꼬미(터잡기)도 제대로 못하냐", "시끼바리(당김 맞춤) 잘해라" 등 요즘 일본에서도 잘 쓰지 않는 1920년대 일본말로 일꾼들을 닦달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이후 1984년 을지로 장교동 일대에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500여곳의 인쇄업체가 충무로로 이전해왔고, 당시 서울시의 이전명령에도 불응하며 버티면서 오늘날 충무로 인쇄골목이 완성됐습니다. 충무로가 영화산업의 메카였던 시절, 영화 포스터는 물론 영화계 데뷔를 꿈꾸는 지망생들의 사진과 이력서, 작가들의 시놉시스들을 찍어주는 인쇄소들이 활황을 이뤘지만, 2000년대 충무로 영화계가 강남지역으로 대거 이전하면서 활황은 끝나고 기나긴 침체가 시작됩니다.

경기 침체와 디지털 기기의 사용 증가로 달력 주문량이 감소하면서 충무로 인쇄골목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경기 침체와 디지털 기기의 사용 증가로 달력 주문량이 감소하면서 충무로 인쇄골목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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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침체와 함께 도심공동화 현상까지 겹치자 지역의 슬럼화는 가속화됐습니다. 충무로 인쇄골목부터 청계천을 바라보고 북으로 쭉 올라가 만나는 세운청계상가까지는 허름한 도심 골목이 이어집니다. 뮤직비디오나 영화에서 뒷골목의 단골소재로 등장할 정도로 시간이 멈춘 듯 합니다. 실제 지은 지 딱 50년이 된 진양상가는 2012년 개봉한 영화 '도둑들'에서 화려한 외벽 전깃줄 장면이 연출된 곳이기도 합니다. 영화의 메카라는 명예는 저물었지만 촬영장소로 소임을 다하는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이곳의 인쇄업 자체도 사양산업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골목에서 20년 이상 일했다는 한 인쇄업자는 "예전 호황일때는 대부분 인쇄소들이 24시간 내내 인쇄기를 돌려도 수요을 맞추기 힘들었다"며 "그나마 7~8년 전까지는 명함 찍는 수요라도 많아서 버틸만 했지만 지금은 명함도 디지털로 주고 받다 보니 예전에 비해 40% 정도 주문이 줄었다"고 한탄을 늘어놓습니다.

[한국의 골목길]충무·을지로 '인쇄골목', 영화 포스터의 산실에서 '빈티지 데이트' 명소로 원본보기 아이콘


이 일대에서 옛 영광을 지키고 있는 것은 그나마 오래된 노포들입니다. 낡고 허름한 점포들은 대를 이어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을 추억하고 소환시킵니다. 1990년대 말부터 만들어진 을지로 '노가리 호프' 골목은 외환위기 이후 인쇄소 사람들의 쓰린 속을 달래주는 공간에서 시작해 지금은 서울 인근 직장인들이 퇴근 후 물 밀듯이 몰려드는 대표 맥주골목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 열리는 '노맥(노가리와 맥주) 축제'는 흡사 옥토버페스트를 방불케 하며 이곳의 명물이 됐습니다. 여름철에 골목 한가운데 크게 옥외영업을 하는 '만선호프' 일대는 저녁 7시만 되면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충무로와 을지로 골목들도 어느덧 '빈티지'의 상징적인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필동 뒷골목의 '필스트리트'라 불리는 젊은 감성의 골목식당들이 생기고 '도시재생사업'이란 정책에 힘입어 젊은 예술가들이 비싼 임대료를 피해 이곳으로 찾아들고 있습니다. 어느새 충무로의 '길거리 박물관(Street Meusium)'은 데이트 명소로 자리잡게 됐고, 이를 타고 수많은 카페들과 식당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관광객들의 핫스팟인 명동과 가까운 이유로 이 일대에는 호텔들도 우후죽순 들어서고 있습니다.

충무로 '길거리 박물관' 일대 모습

충무로 '길거리 박물관' 일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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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골목은 점차 소생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젠트리피케이션'이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큰 길가나 좋은 길목에 놓여있던 터줏대감 인쇄소들, 낡은 상점들은 도로와 먼 쪽으로 점점 밀려나고 있습니다. 명동 입구에서부터 대형 빌딩들이 차츰 들어서면서 야금야금 팽창하고 있는 도심 확장은 언제까지 이 지역이 옛 모습 그대로 남을지 장담할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이곳은 근대화 이후의 골목 형성과 도심공동화에 따른 침체, 다시 도시재생과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대도시 골목들이 겪는 구조적 문제들을 그대로 품고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인쇄골목과 새로운 상가, 호텔들이 각자의 블록에서 공존하는 복합적인 공간이 탄생한 것이죠.

이 기묘한 공존구조가 앞으로 얼마나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변수는 서울시의 정책이죠. 서울시는 2020년까지 이 을지로에서 충무로 일대에 아직까지 살아남아있는 인쇄골목들을 재정비하는 '다시세운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이 지역을 창작인쇄산업의 거점으로 재탄생시키고, 인쇄 관련 기술연구와 교육기관도 만든다는 계획입니다. 100여년의 세월을 버텨낸 인쇄골목은 또 다시 찾아온 변화의 물결 앞에 그렇게 담담하게 서 있습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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