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지금부터 120년 전인 1897년 11월20일은 '독립문(獨立門)'이 준공된 날이다. 현재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 내에 위치한 독립문은 흔히 구한말, 외세로부터 자주독립의 기치를 세우기 위해 독립협회가 모금운동을 벌여 지은 건축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의의를 가진 건축물 치곤 참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총독부가 이 독립문을 문화재로 지정했을 뿐만 아니라 거액을 들여서 보수공사까지 벌였다는 점이다. 일제는 1928년, 독립문 보수를 위해 당시로서 상당한 거금인 4100원의 예산을 써서 수리공사를 벌였으며 1936년에는 독립문을 조선의 문화재로 지정, 고적 제 58호로 등재하기도 했다. 경복궁마저 90%를 헐어버리고 심지어 창경궁은 동물원으로 만들었던 일제가 독립문을 왜 문화재로 등재하고 보수공사까지 했던 것일까?
당시 1896년 초 조선은 묘한 정세가 흐르던 시절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친일내각 수립을 강행하면서 친러세력이던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란 만행을 저지르자, 이에 1896년 2월, 고종이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자신의 신변이 보장되자, 곧바로 격문을 보내 친일내각 일소를 명했고, 친일내각 정치인들은 거의 다 숙청되거나 외국으로 쫓겨났다.
이에 친일세력과는 또 거리가 있었던 서재필 등 친미세력들은 제거되지 않았고, 그의 독립문 건립운동은 고종과 근왕파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그해 5월,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호전되고, 고종의 환궁 목소리가 높아지자 조선왕실은 독립문 건립에 당시 왕세자 순종 명의로 거금 1000원을 기부했다. 이에 친정부 인사들이 대거 독립문 건립운동에 뛰어들어 '독립문건립 추진위원회'가 발족됐으며, 이 위원회가 훗날 독립협회가 됐다.
독립문 현판 양옆에 새겨진 태극기 모습. 1919년 3.1운동 당시 태극기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란 젊은 학생들이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를 보고 참고하기도 했다고 알려져있다.(사진=두산백과)
원본보기 아이콘일제는 바로 이 중국의 제후국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문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조선이 중국의 속방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청일전쟁의 결과 청군이 패배해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이 쫓겨났기 때문이라는 논리를 강조했다. 독립문 자체를 철저히 내선일체의 상징물로 이용해 먹은 것이다. 독립문 건립에 앞장섰던 독립협회 인사들 중 일부가 친일파의 거두가 된 사실도 일제가 독립문을 선전용으로 이용하기 좋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일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독립문 현판에는 태극기가 함께 새겨져 있었던 것. 이 태극기는 3.1운동 당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1919년 3.1운동 당시, 태극기 모양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젊은 학생들이 태극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독립문에 새겨진 태극기 덕분이었다. 고종이나 일제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간에, 독립문은 광복을 염원하는 민중들에게 태극기의 모습을 간직해 알려준 고마운 문이었던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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