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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ounter]역사를 살았던 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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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ounter]역사를 살았던 쿠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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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유력 일간지 ‘엘 파이스(El Pa?s)’ 사이트 국제면의 라틴아메리카 섹션 맨 위에는 얼마 전까지 무려 1년 반 동안 검은색 배경에 한 인물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였다. 그가 죽은 직후부터 계속된 모습이다. 물론 피델 카스트로는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는 희대의 풍운아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쿠바혁명은 20세기 라틴아메리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쿠바, 나아가 라틴아메리카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뿌리째 뒤흔듦으로써 사람들에게 변화에 대한 희망과 미래에 대한 꿈을 심어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쿠바를 찾는 이들은 시간의 흐름이 멈추어 버린 듯한 경관과 마주칠 뿐이다. 쿠바혁명의 역동적인 에너지는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이제는 외부 세계의 변화에 철저히 둔감한 경관과. 1995년 음반, 1999년 영화 제작으로 이어진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프로젝트의 세계적 열풍은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쿠바 경관을 극적으로 부각시킨 사례이다. 아바나 구도심(특히 제때 보수되지 않아 허물어져 가는 건물들), 미국인 관광객들을 위한 클럽과 음악, 노인 음악인, 미국산 낡은 자동차 등이 혁명 이전의 1950년대에 대한 향수를 강렬하게 자극했기 때문이다.

쿠바가 섬나라이고, 아직도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해외여행의 자유마저 제한적인 나라라는 사실이 이러한 경관에 더해지면, ‘폐쇄적인 쿠바’라는 이미지가 자동적으로 완성된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으면 진정한 쿠바를 발견할 수 없다. 쿠바 문학과 문화를 접하면 이 나라만큼 개방적인 나라가 또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음악만 해도 단순히 1940, 50년대의 쿠바 음악이 아니라 아프리카 기원의 손(son)이라는 장르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더구나 손은 1920년대에 미국의 할렘 르네상스 및 카리브의 네그리튀드 운동과 대화하면서 문학에도 영향을 끼쳐 아프로쿠바 문학의 대부 니콜라스 기옌이라는 걸출한 시인을 탄생시킨 이력도 있다.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호세 레사마 리마, 세베로 사르두이 등은 또 어떤가. 카르펜티에르는 에스파냐 황금세기의 바로크와 프랑스의 전위주의와 카리브의 경이로운 현실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레사마 리마는 쿠바 섬 특유의 문학적 정서의 존재를 주장하면서도 아르헨티나의 세계적인 대문호 보르헤스만큼이나 서구 문학 전통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또 프랑스에서 활동한 사르두이는 텔켈 그룹의 탈구조주의 이론과 쿠바와 아시아를 연결시키는 대담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이러한 개방성은 1959년 출현한 쿠바혁명 체제가 지지하는 흐름이기도 했다. 이 책의 편자 중 한 사람인 호르헤 포르넷이 밝히고 있듯이, 혁명정신 고취를 목적으로 정부 산하에 설립된 <아메리카의 집>의 지속적인 관심사 중 하나가 국제 교류였다. 또 혁명의 상징 체 게바라 역시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세 대륙의 국제 연대를 위한 삼대륙 회의(Conferencia Tricontinental)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1966년 제1회 대회가 아바나에서 개최되었을 때 축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행보에는 국제 여론을 호의적으로 만들어 미국의 압력과 봉쇄를 극복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전략적 선택이 아니라 쿠바의 역사적, 문화적 흐름 속에서 나온 선택이었다. 가령 사상과 문학에서 라틴아메리카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한 호세 마르티는 한편으로는 ‘우리 아메리카’를 부르짖음으로써 아메리카에서 북미를 제외하는 ‘폐쇄성’을 보이는 듯했지만,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협력을 통한 반제국주의 국제 연대를 꿈꾸었다. 비슷한 시기, 필리핀의 국부 호세 리살 역시 전 지구적인 반제국주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비록 마르티와 리살이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간의 국제 연대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1960년대의 제3세계 의식이나 오늘날의 전 지구적 남(Global South) 의식의 기원이었다. 페르난도 오르티스의 문화횡단 개념 역시 유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서양을 횡단한 유럽 문화와 아프리카 문화가 뒤섞여 쿠바 문화로 승화되었다는 오르티스의 주장은 기옌의 아프로쿠바주의에 대한 이론적 승인이었는데, 이는 백인계와 흑인계의 갈등을 넘어 국민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상상력이었다. 그러나 나아가 쿠바 속의 아프리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백인인 카스트로가 흑백차별 철폐를 주장하면서 한때나마 미국 흑인들 사이에서 넬슨 만델라만큼이나 인기를 끌고, 흑인 노예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기록한 미겔 바르넷의 ?어느 도망친 노예의 일생?(1966)이 ‘증언’이라는 장르를 활성화시킬 만큼 크게 주목을 받게 된 일도 아프리카적 요소에 대한 쿠바의 승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쿠바의 역사와 문화가 곧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삼대륙 회의라는 원대한 구상의 밑거름이었던 셈이다.

오늘날의 쿠바 현실, 특히 물질적 조건은 녹록치 않다. 또 에베르토 파디야, 기예르모 카브레라 인판테, 세베로 사르두이가 겪은 고초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쿠바 체제는 혁명 주체들의 주장대로 항상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낙원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쿠바 체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고, 생활고로 쿠바를 떠난 이들이라고 해서 곧 모두들 체제 붕괴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그래서 독자들에게 권한다. 쿠바 체제가 붕괴될지 말지 촉각을 곤두세우기보다 쿠바의 진정한 발견자가 되라고. 쿠바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콜럼버스요, 두 번째 발견한 사람은 훔볼트요, 세 번째 발견한 사람은 오르티스라는 말이 있다. 첫 번째는 지리적 발견이고, 두 번째는 쿠바가 설탕과 노예의 섬이라는 사실에 대한 발견이고, 세 번째는 아프로쿠바의 발견이었다. 그런데 이 발견자 명단에 추가해야 할 인물들이 있다. 마르티, 피델, 체 게바라 등이다. 콜럼버스는 정복의 길을 열었고, 훔볼트와 오르티스는 정의롭지 못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으로 그친 반면, 피델과 체는 혁명을 통해서 바꾸어야 할 만큼 불평등이 만연한 쿠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1950년대의 쿠바는 마이애미로 쇼핑을 갈 수 있었던 사람들과 아사 직전의 빈민들로 분열된 나라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쿠바혁명의 “지적 창안자”인 마르티야말로 이들보다 앞서 발견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자격이 있다. 소설가 레오나르도 파두라는 21세기 쿠바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매일매일 역사를 살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말한 바 있다. 경제적 결핍으로 쿠바의 일상생활이 쉽지 않은 현실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쿠바는 마르티 시절부터 역사를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 고난의 역사가 많은 오류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제3세계와 전 지구적 남이라는 풍요로운 국제 연대의 상상력을 제공했다. 전 지구화 시대 우리가 쿠바 문학과 문화를 통해 발견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상상력이다. [문화부 ]

우석균?조혜진?호르헤 포르넷 엮음
글누림
4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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