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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책과 저자]최일남의 새 소설집 '국화 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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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남은 1953년 단편 '쑥 이야기'를 '문예'에, 1956년 단편 '파양'을 '현대문학'에 실어 소설가가 되었다. 등단한 지 올해로 64년째. 여든다섯 노장이지만 여전히 현역(現役)이며 그 사실을 증명하듯 새 소설집 '국화 밑에서'를 출간했다. 2004년에 '석류'를 낸 지 13년 만에 펴낸 그의 열네 번째 창작집이다. 2006년부터 2013년 봄까지 쓰고 발표한 단편 일곱 편을 묶었다.

최일남은 그가 숨쉬는 시대의 사람과 풍경의 깊이를 해학과 유머 넘치는 명문장에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학평론가 권영민은 '삶의 진실과 소설적 상상력'이라는 글에서 "최일남의 문학은 젊음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젊음이란 작가의식의 치열성을 뜻하는 말이다. 그는 문단의 원로를 자처하지도 않으며, 붓을 내던진 채 작가 행세를 하지도 않는다"고 썼다.
권영민의 설명에 따르면, "최일남 문학의 젊음은 그의 작가적 시각이나 태도에 그대로 나타난다. 그의 소설은 어정쩡한 타협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법이 없다. 가야할 길과 버려야 할 것들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태도의 냉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언어는 구슬리는 말이 더 많고, 그의 이야기 속에는 소박한 인간미가 깃들여 있다. 다만 현실의 비리와 모순에 대해서만은 비정의 냉혹성을 보일 뿐"이다.

'국화 밑에서'를 쓴 노령의 소설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최일남은 '작가의 말'에서 "내놓고 실토하기 무엇하지만 요즈음의 노년소설은 형식이 예전보다 많이 다른 듯하다. 객관적 서사(敍事)와 상상력의 단순한 비교를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나같이 문단 데뷔 초장을 납[鉛] 냄새, 즉 신문사에서 보낸 사람은 더구나 처신이 힘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새 소설집에서는 인생의 석양을 사는 사람들의 시선에 담기는 풍진세상의 희로애락이 덤덤하게 펼쳐진다. 하루에 두 군데 장례식장을 방문하게 된 주인공이 상주와 대화를 주고받는 표제작 '국화 밑에서'는 장례를 둘러싼 풍속을 평하고 유년의 기억을 더듬는 이야기다. 소설가에게 세월에 따른 장례 풍속의 변화를 체감하는 일은 곧 자신을 둘러싼 실존과 죽음의 의미를 성찰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문물의 내력에 비추면 새삼 놀랄 게 못 된다 이걸세. 말인들 다를까. 생성, 소멸의 계기와 유효기간이 각각 다른 사람의 입말을 누가 무슨 수로 내치고 들이나. 우리 연배는 돈 주고 배운 공력이 아깝고 그 말과 허물없이 지낸 정의(情誼)가 하도 깊어 쓰레기통에 버렸던 놈까지 다시 줍는 경우마저 있잖은가. 깨끗이 씻어 새말에 곁들이면 섞어찌개 같은 맛이 한층 구수하고."(21~22쪽)

이 책에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최일남은 '작가의 말'에서 "이번에 더 좀 유념한 것은 일본이다. 일본어 교육을 받은 마지막 세대의 한 사람으로 비망록(備忘錄)을 적듯이 썼다"고 털어놓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어 사용을 강요받은 유년의 기억이 일본어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스스로를 인정하여 그 시절 일본어에 대한 기억을 '비망록을 적듯이' 써낸 한편, 모국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는 또한 글쓰기의 본질을 향해 나아간다.

"언문일치가 나쁘지는 않되 글 각각 말 각각의 내력은 어쩔 수 없다네. 터진 입으로 마구 주워섬긴 언어의 파편을 무수한 붓방아질 끝에 다소곳이 내미는 글과 어떻게 비교해. 게다가 이 사람아. 넓은 의미에서 비유는 글쓰기의 알파요 오메가라구. 잘빠진 비유 하나 열 문장 부럽지 않은 이치가 여기 있다네." ('메마른 입술 같은' 54쪽)

최일남의 새 소설집은 이렇듯 인문의 향기로 가득하다. 그러기에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최일남 선생의 문학에서 소설의 지혜와 인간의 기품은 하나"라고 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권성우는 또한 "'국화 밑에서'에 이르러 이 시대의 한국 소설은 노년의 실존과 내면에 대한 또 하나의 인상적인 경지와 단단한 묘사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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