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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제국주의 근대사가 흔든 개인의 삶과 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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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아였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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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일본 소설, 더 정확하게는 일본 태생의 작가가 쓴 소설 두 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왔다. 이시구로 가즈오(61)의 '우리가 고아였을 때'와 하야시 후미코(1903~51년)가 쓴 '방랑기'. 두 편 모두 1920~30년대 동아시아 근대사의 질곡을 담았다. 한 편은 상하이, 다른 한 편은 도쿄가 주 무대다. 두 소설은 국제 정세와 전쟁이 개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촘촘하게 그려냈다.

이시구로는 인간과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은 작품으로 주목받는 현대 영미권 작가 중 한 사람이다.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해 켄트 대학과 이스트앵글리아 대학에서 공부한 뒤 런던에서 글을 쓰고 있다. 1982년에 발표한 첫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으로 위니프레드 홀트비 기념상을 받았다. 그의 세 번째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87)이 1993년에 영화로 만들어졌다. 1995년 대영제국 훈장, 1998년 프랑스 문예훈장을 받고, 1982년에는 영국 시민이 됐다.

하야시는 '서민작가'로 잘 알려진 여성 소설가이다. 타락하고 불안정한 삶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여인상을 사실적이고 직설적인 문체로 써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그의 문학은 절정기를 맞이했으며, 작품은 전후의 황폐한 양상을 그려냈다. 가난하고 힘들지만 꿋꿋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소재로 한 자전적 소설에 인간의 존엄, 문학에 대한 열정을 담았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 2000년에 이시구로가 발표한 장편소설. 작품 속 배경은 런던과 상하이로, 주인공인 사설탐정 크리스토퍼 뱅크스가 현재의 삶과 과거의 불완전한 기억을 일기 일곱 편에 담아내는 형식으로 써내려갔다. 뱅크스는 외국인 공동 조계지였던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도에서 아편을 수입해 중국인들에게 파는 상하이 주재 영국 기업에서 일했다. 남편의 회사 일을 못마땅하게 여긴 어머니는 아편 반대 캠페인을 펼친 여장부다. 어느 날 부모가 실종되고, 뱅크스는 런던으로 거주지를 옮긴다.

이야기는 탐정이 된 뱅크스가 런던의 사교계에서 인맥을 형성하고 사건을 맡아 성공하면서 유명인사가 되어가는 시점부터 전개된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부모를 구하러 상하이로 가는 꿈이 있다. 또한 상하이에는 일본인 친구 아키라와의 추억이 있다. 당시 기억들은 어린아이들의 시선에서 어른들의 세계를 바라보는 순수함이 묻어 있다. 드디어 뱅크스가 상하이로 갔을 땐 그 이면에 감춰진 비밀들이 파헤쳐져 작품의 긴장감을 더한다. 국민당과 홍군의 대립이 커져가고, 국민당과 일본군의 전쟁이 벌어지는 순간 뱅크스는 수소문 끝에 자신의 부모가 전투가 한창인 '토끼굴'에 납치돼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본 군인이 된 아키라를 만난다. 아키라는 일본이 영국과 같이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전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뱅크스는 말한다. "상하이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공동체의 이른바 지도자라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의 정도도 심해졌다…책임을 맡은 자들의 발뺌이나 잔재주, 노골적인 거짓말만 아니었더라도 상황이 지금처럼 위험한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득권과 국가권력이 좌지우지 하는 개개인의 인생이 이처럼 통탄스럽다고. 부모를 찾으러 간 혹독한 여정의 끝에서 뱅크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진실을 알게 된다. 아편전쟁과 이루지 못한 사랑, 질투, 배신, 충격적인 반전까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긴박감이 넘친다.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김남주 옮김/민음사/1만4500원)

◆'방랑기'= 이 소설은 하야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상경한 무렵부터 스물세 살에 결혼하기까지 약 5년간의 기록을 잡지에 연재한 것이다. 여기에 전후(戰後)에 발표한 내용이 추가됐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그리고 1939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삼는 이 작품은 주인공 '나'가 식모 일부터 공장에서 인형만드는 일, 고깃집 종업원, 카페 여급일을 하며 양부와 어머니에게 돈을 부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런 주인공의 모습은 일본의 가난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나'는 식민통치 하에 신음하던 조선인에게 말없이 돈을 건네주거나 간도 대지진 당시 큰 피해를 입은 조선인에 대한 언급으로, 전쟁의 참혹한 실상도 전한다. 간혹 남자관계에 대한 소회도 나타나는데, 여기서 주인공은 자신이 열심히 뒷바라지한 연인으로부터 배신당한 기억을 떠올린다. 마지막 3부에선 일왕에 대한 비판이나 무정부주의에 대한 의견을 피력한다. "황족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존경해야 한다."

'방랑기'는 작가가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을 써 내려간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지만 제국주의와 대공황 시기를 살아가는 하층민에 대한 생생한 보고이기도 하다. "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노동은 신성하다. 누군가가 부추겨서 가난한 자에게 이런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준다. 역겨우리만치 빈민을 경멸하고 무학문맹을 업신여기려고 꼼짝달싹 못하게 여러가지 규칙을 만든다. 빈민은 태어나면서부터 사생아처럼 추락한다." (하야시 후미코 지음/이애숙 옮김/창비/1만4000원)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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