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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환의 지리산별곡②]먹점고개 키다리 소나무아래에서의 냉정과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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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미동~서당마을

[조문환의 지리산별곡②]먹점고개 키다리 소나무아래에서의 냉정과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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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재봉활공장 고개에서 바라 본 섬진강, 건너편은 전라남도 광양시 다압면이다.

겨울산행은 자연과 나와의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다.
마른 나무 가지는 모두 다 숨겨 놓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오묘한 것들이 하나 둘 씩 보였다.

"나에게서 봄을 찾아봐, 생명을 찾아보라구!"
"가만 보면 순도 나 있고 이파리도 숨어 있을 걸?"
"내 몸속에 물 흐르는 소리를 들어봐"
미동마을 지나 먹점고개를 넘어가는 나에게
상수리나무들이 보란 듯 소리를 질렀다.

이날따라 봄은 이미 산 속 깊숙이 와 있었다.
매실나무는 곧 터질듯 순들이 이글거렸고
계곡에서 흐르는 작은 물줄기는 마치 폭포소리와도 같았다.

산이 고요해서일까? 마지막 가는 겨울이라서 일까?
나무도, 계곡도, 순이 트기 시작하는 매실나무도, 바람도
"나에게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좀 들어봐"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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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적량면 괴목마을


미동마을로 출발하기 전에 언뜻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비발디를 들었다.
그날따라 사계의 '겨울'이 어찌나 뜨겁게 다가오던지,
외줄 바이올린은 쉬지 않고 그 뜨거움을 홀로 쏟아 부어 내었다.
거미가 가는 외줄을 쉴 새 없이 뿜어내듯이,
가느다란 열정의 바이올린 선율이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일찍이 바이올린이 이렇게 뜨겁게 들린 적이 없었다.
늘 차갑고 냉정의 소리였던 바이올린이
이날따라 용광로처럼 끓어 넘치는 듯하였다.

"그래, 비발디는 겨울 본연의 의미를 알았던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이처럼 뜨겁게 연주할 수 없었을 테지”
“내가 느꼈던 겨울의 뜨거움, 냉정 속에서 열정을 그도 느꼈음에 틀림이 없어”


한때 일본영화 냉정과 열정을 십 수번씩 돌려봤던 그 냉정,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걷고 있는 먹점고개에서 장대만큼 커다란 키다리 소나무 숲에서
나는 차갑고 싸늘한 겨울바람 대신에 뜨거운 열정을 느꼈다.

"저 지구 땅 속 깊은 곳에는 마그마라는 게 끓고 있다고 했었지”
“그 마그마가 구들장처럼 온 땅덩어리를 데우고 봄을 만들어 내겠지?"


그렇다. 겨울은 봄을 깨우기 위한 마그마다.
겨울 속에는 그 마그마보다 더 뜨거운 열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비발디는 그것을 나와 같은 눈으로 본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사계에서 겨울을 노래하면서 이처럼 차가운 바이올린 선율을
뜨겁게 녹여 놓았나 보다.


“눈보라와 무서리에서 겨울의 차가움이 아니라
봄을 창조해 내고자 하는 열정을 느꼈다면 그대는 옳았다”

“무서리에서도 냉정이 아니라 뜨거워 끓어오르는 열정을 느꼈다면
그대는 옳다”

“비발디의 겨울에서 차가움보다 온기와 열정을 느꼈다면
그대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다”


겨울과 비발디, 그리고 겨울 산을 즐기는 내가 똘똘 뭉쳐 동료가 된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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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마을~서당마을로 가는 길의 풍경

먹점은 고산지대임에도 이날은 햇빛이 따사로웠다.
신촌고개로 넘어가는 오솔길로 이어지는 동네안길은 평화의 길처럼 보였다.

먹점고개길 중턱에서 땀을 식히며 따스한 커피 한잔을 들이켰다.
고목나무 아래 덩치 큰 바위가 마치 곡예라도 하듯이 걸터앉아 있었다.
고목나무 가지는 일정한 방향이 아닌 모두 제각각이다.

구부러지고 틀어지고, 오랜 세월 속에서 자연에 순응한 흔적이
가지 하나하나에 마디 하나하나에서 느낄 수 있었다.

구재봉과 분지봉사이로 난 오솔길 틈 사이로
저 멀리 겹쳐져 보이는 금오산이 보인다.

그의 발밑이 바로 노량이다.
금오산을 배경으로 첩첩이 겹쳐져 있는 산봉우리들이
마치 병풍을 포개 놓은 듯하다.

내 발 끝에 밟히는 느낌이 있다.
신촌마을이다.

설날이면 아버지 손에 이끌려 명태 두 마리, 찹쌀 한 되를 자루에 담아
할머니 제사 모시러 추운 겨울날 저녁에 이십 리를 넘게 걸어 왔던 곳,
큰집 마당에는 산만큼 큰 바위가 있었고,
간들간들한 호롱불 빛, 홍시, 조총, 시루떡
두 시간을 걸어온 나에게 주어진 선물들이었다.

새벽 개 짖는 소리를 들을 때에야 겨우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크게 보였던 신촌마을이 겨우 내 손바닥에 놓일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파랑 빨강 지붕들, 정돈된 도로들,
딱지치기며 팽이놀이 하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동네는 누렁이 개 짖는 소리 외에는 적막했다.

뜨거웠었던 동네 신촌이 차가워져 있었다.
겨울은 뜨겁되 동네는 차갑게 느껴진다.
다시 신촌이 뜨거워질 세월이 있을까?

먹점고갯길 키다리 소나무 숲에서 뿜어져 나오는 겨울의 열정이
이 동네 어귀에도 불어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발 아래로 괴목마을을 돌아가는 모퉁이가 보이고,
그 아래 서당마을이 손짓을 하고 서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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