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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홍상수 영화의 조율된 악기

최종수정 2017.07.14 03:01 기사입력 2017.07.13 10:11

영화 '그 후' 주연한 배우 권해효

영화 '그 후' 스틸 컷

긴 분량 대사 한두 시간 내 외워야..."애드리브는 상상도 못해"
배우의 생각은 손톱만큼도 투영 안 돼 "대본의 쉼표 호흡까지 계산하고 연기"
"세상의 진실을 비추는 영화...'저 악기 괜찮았어'라는 말 한 마디면 충분"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배우 권해효(52)에게 A4 용지 다섯 장은 한없이 무거웠다. 정돈된 가로글씨에 압도당했다. 약 12분 분량의 대사와 지문을 한두 시간 안에 외워야 했다. 더욱이 카메라를 한 번 작동시켜 하나의 쇼트로 촬영하는 롱테이크 신. 조금만 틀려도 다시 해야 했다. 실수를 하지 않아도 열 번 정도 연기를 되풀이하며 세세한 부분들을 잡아나갔다. 홍상수 감독(57)의 연출 방식이다. 촬영 당일 아침에 대본을 쓴다. 배우가 전날까지 대본을 외우거나 배역을 분석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촬영장에서는 배우의 재량이 개입될 여지를 원천 봉쇄한다.

권해효는 이 과정을 네 번이나 경험했다. 지난 6일 개봉한 '그 후'에서는 '다른 나라에서(2011년)',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2016년)',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6년)'에서와 달리 주연이다. 출판사 사장 김봉완. 업계에서 알아주는 문학평론가인데 직원 이창숙(김새벽)과 불륜에 빠진다. 그녀 대신 들어온 송아름(김민희)과의 대화에서 위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면이 드러난다. 배역에 권해효의 생각은 손톱만큼도 투영되지 않았다. 소파에 몸을 묻고 고개를 살짝 들어 다른 곳을 응시하는 동작까지 지시를 받았다. "애드리브는 상상도 할 수 없죠. 대사 전달에서 쉼표 호흡까지 철저하게 계산하고 연기했어요. 토씨 하나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서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어요."

영화 '그 후' 스틸 컷

그를 가장 괴롭힌 건 대사다. 말의 리듬이나 말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치거나 편하게 바꾸려고 할 때마다 감독의 제지를 받았다. "네가 뭘 하려는지 알겠는데, 그렇게 말하면 재미없어. 지루해." 권해효는 다른 나라에서와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을 촬영하면서 홍 감독의 연출 세계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했지만 습관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자존심도 상했다. "제 연기에 나름 자부심이 있어요. 우리말 같지 않은 대사도 우리말처럼 바꿔 전달할 수 있죠. 홍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런 기술이 필요 없어요. 우리말이 가진 리듬에 엇박자를 넣거나 전개 방식을 바꾸면서 대화에 긴장을 불어넣어요. 그래서 지극히 사적인 대화에 관객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죠."

그 후는 시제(時制)의 변화가 많지만 모든 신이 순서대로 촬영됐다. 편집에서 순서를 뒤바꾸지도 않았다. 그 덕에 배우들은 촬영 당일 대본을 받으면서도 홍 감독을 믿고 따라갈 수 있었다. 권해효는 "홍 감독의 영화에서 배우는 교향악 속의 악기"라고 했다. "지휘와 작곡은 물론 연주까지 홍 감독이 직접 해요. 악기가 얼마나 좋은 소리를 내느냐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해요. 음색이 탁해도 충분히 어울릴 만한 곡을 쓰고 연주해내죠. 배우는 튜닝만 잘 되어 있으면 충분해요."
그는 이 교향곡에서 마음을 치유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배우들은 당일 촬영할 것들을 준비해서 와요. 며칠 굶기도 하고 목에 잔뜩 힘을 주기도 하죠. 촬영분의 경중을 따지기도 해요. 홍 감독의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에요. 촬영장 안에서만 집중을 요구해 상당한 밀도의 에너지를 만들어내죠. 연기를 치장하거나 상대배우를 의식하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다 보니 연기하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아요. 세상의 진실과도 가까워지는 것 같고요."

영화 '그 후' 스틸 컷

권해효는 이번 영화에서 아내인 연극배우 조윤희와 부부역할을 맡았다.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는 아내를 빤히 바라본다. 추궁과 회피가 거듭되며 서늘한 기운이 피어오른다. "홍 감독이 '네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인 것 같다'며 출연을 제의했어요. 아내가 그동안 아이들을 키우느라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어요. 오랜만에 호흡을 맞추니까 재밌더라고요. 23년 넘게 함께 살면서 느끼지 못했던 묘한 긴장과 떨림에 사로잡혔어요."

그 후는 홍상수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사생활이 일부 투영된 느낌을 준다. 그래서 배우의 연기가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는 면이 있다. 권해효는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진실을 비추는 영화에요. 설사 그렇게 보는 관객이 있더라도 '저 악기 괜찮았어'라는 말 한 마디면 충분해요. 아마 이 영화에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그런 마음일 거예요. 예술 활동에서 꼭 무언가를 성취할 필요는 없어요.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면 그만이죠."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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