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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성경 덕에 유명해진 로마군인, '본시오 빌라도'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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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총독부 산하 유대 행정장관으로 임명됐던 군인
로마 중앙정부의 강경책에 따라 유대지역을 유혈통치
막판에 정권교체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안토니오 시세리(Antonio Ciseri)의 명작 '에케 호모(Ecce Homo)'에서 군중들에게 예수를 손으로 가리키는 유대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안토니오 시세리(Antonio Ciseri)의 명작 '에케 호모(Ecce Homo)'에서 군중들에게 예수를 손으로 가리키는 유대 총독,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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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신약성경은 물론 사도신경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로마군인 한명이 있다. 바로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해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인 '본시오 빌라도'가 그 주인공이다. 그의 정식 라틴어 이름은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본시오 빌라도는 사실 중국에 성경을 처음 전파했던 마카오의 포르투칼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된 이름으로, 폰티우스 필라투스를 포르투칼어로 읽은 것이다. 실제 필라투스는 서기 26년부터 10년간 유대지역 총독으로 로마에서 파견됐던 군 사령관 출신 공무원이었다.

로마군인으로서 필라투스는 로마제국사에서 보기 드물게 그 이름이 2000년 가까이 전승돼왔다. 사실 항상 조직으로 승부했던 로마군에서 그처럼 개별적으로 이름을 청사에 남긴 이는 매우 드물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옥타비아누스처럼 로마의 대권을 장악했던 인물들을 제외하면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그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것은 그가 처벌했던 베들레헴 출신 유태인 목수인 예수였다. 실제 그의 일대기에 대해선 별로 알려진게 없다.

그나마 서기 1세기 전후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인 '유대 고대사'가 빌라도의 일대기를 살짝 엿볼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는 원래 로마 공화정 시대인 기원전 3세기초, 로마에 합병된 이탈리아 중부지역 원주민인 삼니움 부족의 일원으로 추정되며, 아버지가 스코틀랜드에서 총독으로 근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정확치는 않다. 그의 아버지를 따라 그도 로마군인이 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 재임시절인 서기 26년에 유대 총독으로 파견됐다.
1961년 이스라엘의 로마시대 지어진 야외극장에서 발견된 라틴어 석판.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이름이 포함돼있어 그가 실존인물이었음이 정확히 증명됐다.(사진=위키피디아)

1961년 이스라엘의 로마시대 지어진 야외극장에서 발견된 라틴어 석판.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이름이 포함돼있어 그가 실존인물이었음이 정확히 증명됐다.(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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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유대 총독이라 흔히 표현하지만, 당시 유대지역은 시리아 총독부 산하에 있었고 그의 실제직함은 행정장관 정도로 추정된다. 그는 유대지역에 주둔 중이던 로마군의 통솔 밑 지역 치안과 사법, 행정 등을 도맡았다. 이 지역은 당시 로마제국의 최전선 지역 중 하나로, 로마가 가장 큰 숙적으로 여기던 적국, 파르티아와의 접전지역이었다. 2개의 군단이 상주해있었으며 이에따라 군 출신이 아닌 사람은 총독으로 좀체 파견되지 않는 위험지역이었다.

원래 로마제국의 지방 총독은 임기가 3년 정도였지만,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를 지역안보의 특수성에 좀처럼 지방관을 교체하지 않던 티베리우스 황제의 인사 철학까지 맞물려 그는 무려 10년 동안이나 유대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는 잦은 반란을 일으키는 유대지역에 강경책을 펴고자하는 로마 중앙정부의 지시에 충실했고, 언제나 강경한 자세로 유대 종교인, 정치인들과 맞섰기 때문에 유태인들 기록 중에 그를 좋게 쓴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고 전해진다.

서기 66년, 유대지역 내 반 로마파가 일으킨 내전인 유대-로마 전쟁시 유대 반군이 최후 거점으로 삼았던 마사다 요새의 모습. 현재도 이스라엘군은 신병훈련을 이곳에서 마친다.(사진=위키피디아)

서기 66년, 유대지역 내 반 로마파가 일으킨 내전인 유대-로마 전쟁시 유대 반군이 최후 거점으로 삼았던 마사다 요새의 모습. 현재도 이스라엘군은 신병훈련을 이곳에서 마친다.(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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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정책은 당시 예루살렘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유대교 판관 의회, 즉, 산헤드린과 번번이 충돌한다. 총독 재임 기간동안 치수 사업에 힘써 예루살렘에 물을 끌어왔으나 이것이 성지의 성수(聖水) 판매 사업과 충돌하면서 유대교인들의 불만을 사게 됐고, 황제의 초상을 예루살렘에 들여온 것도 우상숭배라며 비난을 받았다. 집권 기간동안 계속해서 항의 집회가 열리자 그때마다 군대를 동원해 소요를 잠재웠고, 많은 유혈사태를 일으키면서 그의 정책은 로마 중앙에서도 점차 비난이 거세지게 된다.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것 역시 이러한 강압정책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와 그의 후임 총독들의 연이은 강압정책은 훗날 서기 66년 유대지역의 반 로마파가 일으킨 유대지역 반란, 즉 유대-로마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유혈정책을 일삼던 필라투스의 말년은 썩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의 유혈정책으로 당시 유대의 사마리아 지역 일대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사마리아인들이 이를 필라투스의 상관인 시리아 총독에게 항의했으며, 이에따라 그는 유대 행정장관에서 해임돼 재판을 받으러 로마로 파견된다. 그러나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 전,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고 칼리굴라가 새 황제로 임명되는 정권 교체가 이뤄지면서 그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의 최후는 명확히 알려져있진 않지만, 자살하라는 칼리굴라 황제의 명으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당시 로마제국 지역 사령관들이 대개 그렇듯, 전 정권에서 군부 요직에 있었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어찌보면 발에 채일정도로 많던, 말년에 운이 별로 좋지 못했던 당대 로마의 지방 군사령관 중 한명에 불과했던 그의 이름은 그가 처형시킨 유대지역 시골의 한 청년으로 인해 2000년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리게 된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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