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한반도 고대국가 중에 유독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부패와 사치, 쾌락의 폭군으로 알려져있다. 당나라와 신라군이 함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삼천궁녀와 향락을 즐겼고, 계백이 이끄는 5000명의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장렬히 전사한 후, 사비성이 함락되자 포로로 잡혀 당나라로 끌려갔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의자왕은 사실 한국 고대사에서도 상당히 미스터리한 인물로 남아있다. 백제 제 30대 임금인 무왕의 큰아들로 태어나 성품이 용맹스럽고 담이 크며, 결단력이 있는데다 효성도 지극해 당나라에서도 '해동증자'라고 불렀다한다. 사실 당대 중국에서 외국인에게 이 정도 찬사를 주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국제무대에서 의자왕의 이미지가 상당히 좋았음을 알려준다.
의자왕 시기 확장된 백제의 영토. 의자왕은 백제가 멸망하기 1년전인 659년까지도 활발한 대외 원정사업을 이어가던 정복군주였다.(사진=KBS1 '역사저널 그날' 방송 화면 캡쳐)
원본보기 아이콘643년에는 신라와 당의 연결통로인 당항성을 공격해 신라를 긴장시켰고, 이후 649년까지 신라를 몰아붙여 거의 멸망 직전 상태까지 몰고 갔다. 결국 위기에 처한 신라는 진덕여왕이 친히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이란 한시를 당 고종에게 지어 바치고, 원군요청을 할 정도로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후 650년대로 넘어가면서 의자왕은 고구려, 왜와 연계해 신라를 고립시키고 당의 개입을 막는 외교노선을 걷게 되며, 신라는 당과 연합해 이 수직 연계를 깨트리려 노력했다.
이러한 정복군주로서의 면모와 함께, 대내적으로는 '대성팔족(大姓八族)'이라 불리던 8개 귀족가문 중심으로 돌아가던 백제의 정치를 왕권 중심으로 돌리기 위해 애썼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친위쿠데타까지 불사하며 노력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화 계획은 큰 반대에 부딪혔고, 이후부터 그는 사치와 향락에 빠진 타락한 군주처럼 묘사되기 시작한다. 의자왕의 대외 확장정책을 뒷받침하던 장수들인 의직, 계백, 흑치상지 등의 인물들이 의자왕의 친위세력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과 기존 귀족간의 알력이 심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660년 나당연합군은 당군 13만, 신라군 5만의 대군을 이끌고 동서로 백제를 포위한 상황이었다. 이미 정치적 알력으로 의자왕과 정쟁이 심했던 백제 귀족들은 상당수가 등을 돌렸던 것으로 추정된다.(자료=두산백과)
원본보기 아이콘마지막 황산벌 전투를 앞두고 삼국사기에서는 향락에 빠진 의자왕이 충신 성충의 전략을 받아들이지 않고 전략을 잘못세워 멸망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성충은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해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라고 간했으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 여부는 불투명하다. 계백이 황산벌에서 신라군 5만을 막기 위해 출전했을 때, 당나라의 13만 대군은 이미 기벌포에 상륙했고 양군 규모는 이미 백제 전체 전력을 넘어선 상황이라 성충의 의견대로 사비성 일대만 잘 막았다고 해서 위기를 모면할 가능성은 적었다. 또한 지방 군사력을 지니고 있던 백제 귀족들도 의자왕의 중앙집권화에 따른 불만으로 상당수 의자왕을 등졌을 가능성이 높다. 계백을 지원하거나 구원병이 왔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에 대해 이러한 추정이 나오는 이유다. 또한 사비성이 위험해지자 웅진성으로 퇴각하던 의자왕이 수하장수의 배신으로 포로로 잡혀 나당연합군은 당군이 기벌포에 상륙하고 불과 열흘도 안되서 백제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한다. 불과 한해 전까지 신라를 군사적으로 밀어붙이던 백제가 순식간에 멸망한 셈이다.
이로인해 최근에는 의자왕이 사치와 향락, 삼천궁녀에 빠져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했다는 기존 이론보다는 백제의 대내적인 정치상황, 대당 외교정책의 실책, 신라와의 오랜 전쟁에 따른 국력 손실과 귀족들의 불만 등이 백제 패망의 직접적 원인으로 추정되고 있다. 승자의 기록 속에 가려진 정복군주인 의자왕의 실제 모습은 좀더 많은 연구가 이뤄진 이후에 정확히 나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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