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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 사라진 고구려 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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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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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668년 고구려가 멸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 수군의 구체적인 활동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삼국통일과정에서 고구려 수군이 홀연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일각에서는 당시 고구려에는 수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수·당제국의 수십만 대군을 당당히 막아내던 고구려에는 수군이 정말 존재하지 않았을까?


648년 김춘추가 나당동맹을 체결하고 귀국할 때의 일이다. 김춘추 일행은 해상에서 고구려의 '순라병(巡邏兵)'에게 발각돼 쫓기는 신세가 됐다. 이 때 김춘추를 따르며 모시던 온군해가 나섰다. 높은 관직의 모자를 쓰고 큰 옷을 입은 후 일부러 뱃머리 위에 걸터앉았다. 고구려 군사는 그를 김춘추로 착각해 잡아 죽였다. 그 사이 김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무사히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고구려의 순라병은 해안 경비를 담당하던 군사라 할 수 있다. 648년 당시 고구려의 해양 방어시스템은 분명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660년 백제 멸망과 668년 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고구려 수군의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는다. 663년 신라ㆍ당 연합군과 백제ㆍ왜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백촌강 전투에서도 고구려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광개토왕릉비'에는 396년 광개토대왕이 대규모 수군을 동원하여 백제의 58성(城)과 700촌(村)을 함락시켰다고 되어 있다. '솔수군(率水軍)'이라 하여 수군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당시 고구려가 백제 북방 영토에 대한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성공시켰음을 알 수 있다. 4~5세기 강성했던 고구려의 수군이 7세기 삼국통일기에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고구려 수군의 흔적들을 찾아보자.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당은 이듬해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 공략에 나섰다. 661년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을 포위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따르면, 이 때 소정방이 고구려 군사를 패강에서 깨뜨리고(蘇定方破我軍於浿江) 마읍산을 빼앗은 후 평양성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신당서' 동이열전에도 패강에서 싸운 것으로 돼 있다. '어패강(於浿江)'이라고 표기된 점에서 소정방의 당군은 패강(대동강)에서 고구려군과 수전을 벌였을 가능성이 크다.


667년 당은 다시 대대적으로 고구려 공략을 시도했다. 총사령관 이적이 이끄는 당군은 요하(遼河)를 건너 육로로 공격을 시도했고, 곽대봉이 이끄는 당군은 해로로 평양을 직접 공격하고자 했다. 이 때 이적은 별장(別將) 풍사본에게 명하여, 군수물자를 곽대봉이 이끄는 당군에게 공급케 했다. 그런데 양곡과 무기를 실은 풍사본의 선박들은 파손되어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師本船破失期). '선파(船破)'의 원인은 풍랑으로 인한 좌초이거나 혹은 적군의 공격으로 인한 침몰일 수밖에 없다. 사서 기록상으로는 어떠한 원인에 의해 파손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고구려 수군의 공격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고 670년 고구려 부흥운동이 발생했을 때의 일이다. 670년 궁모성(窮牟城)에서 거병한 검모잠은 유민들을 수습하여 대동강 남쪽에 도착하여 당의 관인들을 살해한 후, 다시 신라로 향해 서해(西海) 사야도(史冶島)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고구려 대신(大臣) 연정토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漢城)으로 맞아들여 임금을 삼았다. 검모잠과 안승이 만났던 사야도의 위치 비정은 논란이 있지만, 섬이었던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검모잠 세력과 안승 세력은 모두 일정 규모 이상의 수군 내지는 선박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비록 대대적이고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삼국통일기를 전후하여 고구려 수군의 흔적들은 분명 확인가능하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수전(水戰) 기록은 없을까? 661년 고구려 공격에 나섰던 당나라 장수 오흠의 묘지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용삭(龍朔) 원년 (당 고종이) 패강도(浿江道)에서 하늘의 도리를 받들고 위엄을 이어 죄를 물을 때, 군(君)은 배에 무기를 감추고 성루(城樓)에서 홀로 (적을) 굽어보고 분주히 달렸다. 배를 타고(浮龍) 수로를 따라 공격하니(水劍), 월협(月峽)에서 앞서기를 다투며 명성을 날렸다."


패강도는 평양에 이르는 대동강 일대를 의미하며, 월협은 중국 장강(長江)에서 물살이 빠른 명월협(明月峽)을 의미한다. 오흠은 배에 승선해 대동강 수로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적과 싸웠던 것이다. '수검(水劍)'이라 하여 수전이 벌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대동강 수로에서 당군을 막아선 세력은 고구려 수군임에 틀림없다. 비록 고구려 수군이 당군에게 패하긴 했지만, 당군의 주 접근로인 대동강 수로를 차단하기 위해 방어전을 펼쳤던 사실이 확인되는 셈이다. 삼국통일과정에서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인해 고구려의 수군 역량이 조금씩 삭감되어 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안악3호분의 행렬도. 고구려 군의 편성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지만 수군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고구려 안악3호분의 행렬도. 고구려 군의 편성을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자료지만 수군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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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수군 전통은 발해가 건국된 후에도 이어졌다. 732년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 수군은 요동반도를 지나 산동반도로 향했다. 당시 장문휴가 거느린 수군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의 수비군을 감안하여 대략 1만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장문휴는 등주(登州)에 상륙해 당의 지방장관이었던 자사(刺史) 위준을 살해해 버렸다. 장문휴의 활동은 대규모 수군을 조직하고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물론 대규모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발해의 대규모 수군 운용은 고구려의 수군 운용 경험에서 비롯된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660년 백제 멸망 당시 당군은 금강 수로를 이용했고, 신라군은 육로를 이용해 사비성으로 향했다. 661년 당군은 대동강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668년 당군은 평양성으로 직접 연결되는 대동강 수로를 이용하지 않았고, 신라군도 마찬가지로 수군을 동원하지 않고 육로를 이용해 북상했다. 고구려의 수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면, 나당연합군이 시간 소모와 보급문제가 야기되는 육로를 택한 것은 비효율적이다. 다시 말해 대규모 부대가 신속한 기동과 보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해로를 활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668년 고구려 멸망 당시 나당연합군이 대동강 수로를 이용할 수 없었던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고구려의 수군과 육군이 연합하여 대동강 수로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당연합군이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육로 공격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평양에서 서남쪽으로 약 24km 거리에는 대동강 북안에 서학산, 남안에 정이산이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강폭이 1㎞ 이상 지속되던 대동강 수로가 지형상 500~600m로 줄어들어 병목현상이 발생한다. 강폭이 좁아지다 보니 '강서군지(江西郡誌)'에는 "수심이 깊어 증기선(蒸氣船)을 정박시킬 수 있다"고 돼 있다.


또한 일제시기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고적조사보고(朝鮮古蹟調査報告)'에는 "대동강을 통제할 수 있는 둘도 없는 요해처이다. 이곳에서 한번 수비에 실패하면 평양에 이르기까지 다시 방어할 지점이 없다"고 돼 있다. 고구려는 660년 백제의 멸망과 661년 평양성 포위가 모두 수로를 통해 이루어졌던 것을 목도했다. 이에 668년 고구려는 남아 있던 수군을 끌어모아 육군과 함께, 이 일대에 방어를 강화하여 대동강 수로를 차단했던 것이다.


물론 고구려가 선박의 세대 교체에 실패했거나 조선과 항해기술 등의 전수가 미흡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장기전으로 인해 막대한 재원이 필요한 수군 운용보다는 농성 위주의 전략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조직적인 대규모 수군 활동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고구려에 수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여러 정황들을 감안하면 연안에 기반한 소규모 수군은 분명히 존재했다고 보아야 한다. 함부로 고구려의 저력을 과소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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