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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박승환 참령의 자결, 남대문 전투에 불을 붙이다

최종수정 2018.11.21 11:07 기사입력 2018.11.21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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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 대대장으로서 통분하며 자결
소식에 분격한 장병들 일본군과 전투, 진압됐지만 이후 의병에 대거 합류

[이상훈의 한국유사]박승환 참령의 자결, 남대문 전투에 불을 붙이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해산당했다. 이때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은 울분을 참지 못해 자결하였고, 이를 계기로 분격한 장병들이 탄약고를 부수고 무장하여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남대문 전투의 시작이다. 남대문 일대에서 수 시간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화력이 우세했던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했다.

군대 해산과 남대문 전투 이후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이 의병에 대거 합류하면서, 의병 활동은 더욱 조직화되고 격렬해졌다. 정미의병(丁未義兵)은 이전의 의병 활동과 달리 전국 규모로 확대되었고, 해산 군인의 참여로 전투력이 강화되었으며, 평민의 참여가 크게 확대되어 전 민족적 항일투쟁 양상을 띠었다. 이렇듯 전국 규모로 격렬했던 정미의병의 도화선이 된 것은 바로 박승환 참령의 자결이었다. 당시 박승환은 대대장으로서, 군대 해산 계획을 듣고 분개하여 권총으로 자결했다고 알려져 있다.

박승환 참령의 자결 상황을 국가보훈처 '국가유공자 공훈록'을 통해 확인해 보자. “군대해산의 명을 전해 듣고 크게 분개하여 ‘군인은 국가를 위하여 경비함이어늘 이제 외국이 침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군대를 해산하니 이는 황제의 뜻이 아니오 적신이 황명을 위조함이니 내 죽을지언정 명을 받을 수 없다’하고 통분한 나머지 대대장실에서 몇 자의 유서를 쓰고 ‘대한제국만세’를 외친 다음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박승환은 대대장실에서 유서를 작성한 다음 대한제국만세를 부른 후 차고 있던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1976년 박기태가 그린 '박승환 참령의 순국 기록화'에는 이러한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림 왼편에는 책상 위에 박승환이 작성한 유서가 보이고, 오른편에는 자결을 시도한 박승환과 이를 부축하는 두 명의 장병이 보인다. 그리고 바닥에는 권총이 떨어져 있어 박승환이 권총으로 자결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1943년에 작성된 '한국광복군소사(韓國光復軍小史)'에는 “군대해산식이 거행되자 승환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대성통곡하다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하였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1941년에 작성된 '광복(光復)'에도 마찬가지로 박승환이 ‘권총’으로 자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박은식은 1915년에 '한국통사'를 쓰면서 “수인단창(遂引短?) 자사이폐(自射而斃)”라고 하여, ‘단창(短?)’ 즉 권총을 사용한 것으로 서술하였다.
남대문 전투(르 프티 주르날)

남대문 전투(르 프티 주르날)

박은식은 다시 1920년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쓰면서 “수인단창자폐(遂引短槍自斃)”라고 하여, ‘단창(短槍)’ 즉 짧은 창을 사용한 것으로 서술하였다. '한국통사'와 한자 표기상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1910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수거의추도(遂據椅抽刀) 횡자결조(橫刺決?)”라고 되어 있다. ‘추도(抽刀)’ 즉 칼을 뽑아 자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07년에 박승환이 자결했으므로, 1910년 무렵에 작성된 '매천야록'은 다른 기록들보다 당대의 기록에 가깝다.

1907년 당시 현장에 개입한 일본측 보고문을 살펴보자. 한국주차군사령관이 일본군 참모총장에게 보고한 전문에는 “박승환이 분격하여 자살을 기도했다”고 되어 있는데, 어떤 무기를 사용하여 자결했다고는 명기되어 있지 않다. 전문의 발신시점은 8월 1일 오후 5시 10분이며, 착신시점은 8월 2일 0시 45분이다. 즉 군대 해산과 박승환 자결이 일어난 당일의 보고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경무고문(警務顧問)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가 보고한 8월 2일자 전문에도 “박승환이 분격하여 자결한” 것으로만 되어 있지, 어떤 무기로 자결했는지는 명기되어 있지 않다.

“서소문 안이 이런데 제1대대장 박성환(박승환)씨는 일본대장들이 그 영문에 와서 군기를 거두고자 함에 박씨가 가진 뒤 내가 대대장이 되어 병사들에게 군기를 내어놓으라고는 차마 못하겠다하고 찾던 바 군도를 빼어 자기 배를 찔러 즉사하였고”

8월 1일 박승환 자결 이후 오래지 않아 신문기사가 나왔다. '경향신문' 8월 9일 기사에 8월 1일의 상황을 정리한 내용이 올라온 것이다. 여기에는 박승환이 ‘군도(軍刀)를 빼어 자신의 배를 찔러’ 자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경향신문'은 1906년 천주교에서 창간한 순한글판 주간신문이었다. 당시 통감부(統監府)의 언론 탄압을 피하고자 프랑스인 신부를 발행인으로 하여, 국내 주요 기사를 다루었다. 즉 한국인의 입장에서 기사를 작성했다. 박승환 자결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한 이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각 대장(隊長)은 부하들을 병영 내에 집합?정렬시켰고, 오전 9시경 장교 인솔하에 부대를 출발했음. 그런데 시위보병 제1연대 제1대대가 각 중대별로 정렬시켜 인원 점호를 하고 있을 때, 대대장 박승환은 자기 집무실에서 자살했음(칼로 목을 베어 죽었다고 함). 이를 들은 하사관 이하 병사들은 대오를 이탈하여, 부대내 탄약고를 파괴하고 탄약을 끄집어 내는 동시에 각 내무실에서 총을 휴대하고 사방을 향해 사격을 난사했는데, 장교가 지휘하였다고 평가됨.”

일본군 헌병사령관 하야시 타다오(林忠夫)가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에게 보낸 보고문의 일부이다. 보고 일자는 1907년 8월 7일로 ?경향신문』 기사보다 2일이 앞선다. 이 보고문에는 박승환이 대대장실에서 자살한 사실과 그 이유를 괄호를 이용하여 부연 설명하고 있다. 괄호 안에는 “도물(刀物)로 인후부(咽喉部)를 베어 죽었다고 함”이라고 되어 있다. 즉 ‘칼로 목을 베어 죽었다’는 것이다.

이 보고문은 헌병사령관이 육군대신에게 보고한 것인데, 문서의 모두에는 “제14헌병대장으로부터 별지와 같이 보고가 있었기에 간추려 보고함”이라고 되어 있다. 즉 제14헌병대장이 당시 현장과 상황을 조사하고 정리하여 헌병사령관에게 보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 박승환의 자결 방식을 부연 설명하면서 ‘권총’이 아니라 ‘칼’로 기록한 것이다.

'경향신문'에는 칼로 배를 찔러 자결했다고 되어 있고, '헌병사령관 보고문'에는 칼로 목을 베어 자결했다고 되어 있어 서술상 차이가 있다. 하지만 두 기록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인의 입장과 일본군의 입장에서 모두 박승환은 권총이 아니라 칼로 자결한 것으로 인식한 점이다. 두 기록이 당대의 기록이라는 점과 칼이라는 공통점을 감안하면, 박승환은 권총이 아니라 칼로 자결한 것으로 파악해야 자연스럽다.

박승환 참령의 순국 기록화

박승환 참령의 순국 기록화

일각에서는 “박승환이 부하 장병의 봉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대대장이라는 직책을 감안하면 자결이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다”라고 평하기도 한다. 자결보다는 전군을 지휘하여 적극적으로 저항을 했어야 하는데, 자기 일신만 욕되지 않기 위해 무책임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군인으로서 지휘관으로서 실탄이 장전된 권총이 있었다면, 당연히 적군을 몇 명이라도 쏘아 죽이고 저항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군대 해산 전날인 7월 31일에 조선군주차군사령관의 보고문이 올라왔다. “서울에 있는 한국의 여러 부대는 내일 부대가 해체될 예정이므로 오늘밤은 만일의 경우를 고려하여 서울에 위치한 여러 부대는 경계를 엄하게 하였으며 용산에서 대대장이 지휘하는 보병 3개 중대를 서울로 불러들였음.” 일본군이 우려한 만일의 경우는 대한제국군이 다음 날인 8월 1일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봉기하는 상황이다. 사전 차단과 무력 진압을 위해 일본군은 무기고와 탄약고에 대한 방비를 엄중히 했음이 분명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이 곧 해산당할 적군 지휘관에게 실탄을 소지하도록 허용했을까? 박승환이 아무리 대대장이라고는 하지만, 군대 해산이 예정된 당일 아침에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그 전날 일본군의 경계와 방비가 강화된 점에서 볼 때 대한제국군에게 실탄은 분배되어 있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봉기를 일으킨 장병들이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탄약고였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군대 해산을 위해 일본군이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장병들은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이때 대대장이 단순히 입으로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장병들이 호응하여 봉기할 가능성은 없다. 장병들을 격동시킬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결국 박승환은 칼로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장병들을 각성시킬 수 있었다. 대대장의 자결과 동시에 장병들은 무기고와 탄약고로 뛰어가 무장하고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박승환은 군인으로서 지휘관으로서 ‘살신성인(殺身成仁)’을 직접 실천한 인물이었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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