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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열정과 집착 사이

최종수정 2018.08.29 13:52 기사입력 2018.08.29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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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 「발리의 초상」, 1912년
(32.2 x 39.8 cm, 레오폴트 미술관, 오스트리아 빈)

에곤 실레, 「발리의 초상」, 1912년 (32.2 x 39.8 cm, 레오폴트 미술관, 오스트리아 빈)


에곤 실레는 1911년 발리 노이칠을 만났다. 실레는 스물한 살, 발리는 열일곱 살이었다. 그 후 4년간 발리는 실레의 연인이자 모델 노릇을 했다. 2016년 출시된 영화 「에곤 실레: 죽음과 처녀」(한국에서는 「에곤 실레: 욕망이 그린 그림」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는 두 사람의 만남과 이별을 다루고 있다.

1910년 실레는 보헤미아의 크루마우에 작업실을 구했다. 복잡한 빈에 염증을 느끼고 자연 속에서 그림에 몰두하려 한 것이다. 이곳이 오늘날 관광지로 유명해진 체코의 체스키크롬로프이다. 일 년 뒤 실레는 크루마우에 발리를 데려왔다. 두 사람은 실레가 존경하던 클림트의 작업실에서 만났을 것이다. 발리는 클림트의 모델 중 한 명이었다. 그런데 실레는 얼마 못가 크루마우에서 쫓겨났다. 결혼도 안 한 채 발리와 동거를 했고, 마을의 십대 소녀들을 모델로 써 동네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실레는 빈 서쪽 노일렌바흐에 새 작업실을 구했다. 여기도 곧 껄렁한 동네 청소년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화가의 자유분방한 생활 태도는 주민들의 노여움을 샀다. 1912년 실레는 미성년자 유혹과 강간 혐의로 체포되었다. 작업실에 있던 백여 장의 드로잉도 압수되었다. 석 주 동안 갇힌 끝에 혐의를 벗었지만 미성년자 앞에 외설적인 그림을 전시했다는 이유로 사흘간 추가 구금되었다.

그 후 몇몇 굵직한 전시회에 참가해 주목을 받게 된 실레는 에디트라는 아가씨와 결혼할 마음을 굳혔다. 4년 동안 자신이 시키는 대로 온갖 자세를 취해주고,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발리를 버리고 성공과 안정된 미래를 위해 점잖은 가정 출신인 에디트를 택한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에곤 실레, 「꽈리가 있는 자화상」, 1912년
(32.2 x 39.8 cm, 레오폴트 미술관, 오스트리아 빈)

에곤 실레, 「꽈리가 있는 자화상」, 1912년 (32.2 x 39.8 cm, 레오폴트 미술관, 오스트리아 빈)

실레의 공적은 19세기 말까지 엄격한 금기의 영역이었던 성애를 미술의 주제로 끌어들인 것이다. 실레는 성기를 노출시킨 누드, 남녀 또는 여자들끼리 뒤엉켜 있는 장면을 거침없이 다루었다. 신경질적으로 떨리는 선, 근육 경직을 일으킨 것 같은 인물들의 부자연한 자세에서 당대의 성적 긴장을 읽을 수 있다. 인간의 잠재의식과 성 충동을 다룬 프로이트의 저서들이 세상을 뒤흔들던 시기였다.
이러한 일련의 그림들 속에 발리가 있다. 발리와 헤어진 실레는 그녀를 모델로 그려 놓았던 초안을 토대로 「죽음과 처녀」를 완성했다. 발리를 닮은 여자는 남자를 끌어안고 있지만 얼굴에 죽음의 그늘이 덮인 남자는 포옹에 몰두하지 못하고 한눈을 팔고 있다. 발리는 간호사 교육을 마치고 군병원에 파견되었지만 1917년 성홍열로 죽었다. 불과 스물세 살이었다. 실레는 1915년 에디트와 가정을 꾸렸으나 1918년 전 세계를 덮친 스페인 독감에 걸려 부부가 사흘 간격으로 생을 마감했다. 에디트는 임신한 상태였다.

발리는 실레가 에로틱한 그림을 그릴 때 모델이 되어주었으며, 실레가 크루마우에서 쫓겨날 때도, 감옥에 갈 때도 그의 곁을 지켰다. 실레의 여러 작품에서 황갈색 머리, 몽상에 잠긴 눈빛을 한 발리를 볼 수 있다. 1912년에 그려진 「발리의 초상」에서 그녀는 하얀 칼라가 달린 검정 드레스를 입고, 고개를 갸우뚱한 채 관객을 바라본다. 오른쪽에는 잎이 달린 식물 한 줄기가 그려져 있다. 같은 해에 그려진 「꽈리가 있는 자화상」과 짝을 이루는 그림이다.

「발리의 초상」은 현재 오스트리아 빈의 레오폴트 미술관에 있다. 이 미술관은 안과의사였던 루돌프 레오폴트의 컬렉션을 바탕으로 2001년 문을 열었다. 클림트를 비롯해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중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전 세계에서 실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미술관으로 유명하다. 레오폴트는 의과대학 학생이던 1950년 수집을 시작했다. 학생이라 큰돈이 없었으므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값싼 소품 위주로 구입했다. 그는 좋게 말하면 열정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집착이 강한 수집가였다. 작품을 팔고 싶지 않다는 소유자를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쫓아다녔고, 소유자의 경제 사정이나 무지를 이용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제시했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실레, 코코슈카 같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실레의 누드 드로잉은 포르노그래피로 생각되어 고작 몇 십 달러에 팔리는 형편이었다. 레오폴트가 헐값에 사 모은 그림은 20세기 말 수십만 달러의 가치를 지닌 고가의 예술품이 되었다.

컬렉션은 점차 개인이 감당하기에 버거운 규모로 불어났다. 1994년 어느 덧 일흔 살에 접어든 레오폴트는 재단을 만들어 정부와 협상을 했다. 컬렉션 전체를 시세의 삼분지 일 가격으로 인수하는 대신 정부는 레오폴트의 이름을 붙인 미술관을 설립하고, 그에게 종신 관장 직을 맡기기로 했다. 이를 위해 목록을 작성하고 가치를 감정한 결과 컬렉션은 5400점에 달했으며 5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미술관 설립 계획이 착착 진행되던 1997년 가을이었다. 뉴욕 현대 미술관 통칭 모마(MoMA)는 실레의 작품을 대여해 특별전을 개최했다. 레오폴트는 자신의 컬렉션을 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고 직접 250점을 골라 뉴욕으로 보냈다. 그런데 사단이 일어났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주디스 도버진스키가 <뉴욕 타임즈>에 칼럼을 기고해 모마 특별전에 전시된 몇몇 작품의 소장 이력을 문제 삼고 나섰다.

도버진스키의 칼럼에 따르면 「발리의 초상」을 최초로 소유한 사람은 레아 본디 야라이라는 유태계 미술상이었다. 나치의 유태인 박해가 심해지자 1937년 레아는 영국으로 피신했다. 이 초상화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프리드리히 벨츠라는 자가 빈을 떠나려는 레아를 위협해 그림을 빼앗았다. 나치 협력 미술상이었던 벨츠는 유태인 수집가 하인리히 리거 박사의 컬렉션도 빼앗았다. 박사는 벨츠의 협박에 굴복해 자신의 컬렉션을 말도 안 되는 헐값에 넘긴 후 테레진 수용소에 끌려가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군은 벨츠를 체포했고, 그가 불법적으로 긁어모은 작품들을 회수했다. 그런데 미군의 실수로 「발리의 초상」은 리거 박사의 컬렉션으로 분류되었다. 오스트리아 국립 미술관은 리거의 자손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컬렉션을 정식 인수했다. 1946년 빈을 방문한 레아는 「발리의 초상」이 벨베데레 미술관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할 힘도, 소송을 할 경제력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런던으로 돌아갔다. 1953년 실레 작품 수집에 열을 올리던 레오폴트는 런던에서 미술상으로 일하는 레아를 만났다. 그녀는 레오폴트에게 「발리의 초상」을 되찾도록 도와주면 런던에 흩어져 있는 실레 작품의 구입을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레오폴트는 레아의 제안을 묵살했다. 그리고는 「발리의 초상」을 슬쩍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다. 1954년 클림트 한 점과 다른 석 점의 그림을 벨베데레에 넘긴 대가로 레오폴트는 「발리의 초상」을 손에 넣었다. 1969년 레아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사망했다.

에곤 실레, 「죽음과 처녀」, 1915년
(150 x 180 cm, 벨베데레 미술관, 오스트리아 빈)

에곤 실레, 「죽음과 처녀」, 1915년 (150 x 180 cm, 벨베데레 미술관, 오스트리아 빈)

1997년 12월 24일 <뉴욕 타임즈>에 게재된 도버진스키의 칼럼을 본 레아의 자손들은 모마에 문제를 제기했다. 지루한 법정 공방이 시작되었다. 1998년 뉴욕 카운티 지방법원은 「발리의 초상」과 다른 몇 작품에 대해 압류장을 발부했다. 부당하게 취득한 나치 몰수품이라는 이유였다. 레아의 자손들은 레오폴트가 나치 몰수품임을 아는 상태에서 벨베데레 미술관과 거래를 했다고 주장했다. 레오폴트 재단은 레아가 1954년 작품 소유권을 포기했으며, 레오폴트가 작품을 구입했을 때 나치의 몰수품임을 알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맞섰다. 1999년 지방법원은 원고의 주장을 기각했으나 2009년 미 연방 법원은 레오폴트 재단이 모마에 작품을 보낼 때 문제의 소장 이력을 알고 있었다고 최종 판결했다.

2010년 7월 <아트 뉴스페이퍼>는 레오폴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레아의 자손들과 합의에 도달했고 보도했다. 레아 본디 재단은 1,900만 달러를 받고 그림의 소유권을 포기했다. 압류되었던 「발리의 초상」은 레오폴트 미술관으로 돌아가 「꽈리가 있는 자화상」과 나란히 걸렸다(최근 이 미술관을 방문한 지인의 말에 따르면 올해가 실레 사후 100주년인 해라 기념 특별전을 하느라고 배치를 바꾸었다 한다).

이 사건이 마무리된 직후 레오폴드는 여든 다섯 살로 세상을 떠났다. 표면적으로 그는 예술을 애호하고 예술품 수집에 평생을 바친 교양인이었다. 빈 교외 그린칭의 소박한 집에서 부인과 수십 년을 살았으며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다. 정부에 컬렉션을 넘긴 후에도 작품 수집을 계속했다. 어쨌든 죽은 자들은 말이 없다.

예술사 저술가ㆍ경성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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