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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 3]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과학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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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레예프가 발견한 원소주기율표 완성기

홍상수 감독이 독특한 형식으로 만든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란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보여줍니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동일 인물이 같은 시공간에서 반복되는 상황을 전개하며 미세한 차이를 통해 다른 결말로 이끌어 냅니다. 기억나는 장면 중 배우들이 횟집에서 소주를 마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1, 2부에 있는 이 장면이 같아 보입니다. 소주병의 숫자, 위치까지 같습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작은 차이가 보입니다. 횟집 장면 이후부터는 여전히 같은 시공간과 동일 인물이지만 태도와 대사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흡사 시간여행과 비슷하지만 감독만의 절제된 방식으로 관객에게 관점의 차이를 질문합니다. 저는 친구들과 이 영화를 본 후 얼굴을 마주보며 말없이 그저 웃기만 했습니다. 분명 대단한 메시지가 숨어 있는데,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서로가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겁니다. 심지어 영화의 1부 제목까지 "지금은 틀리고 그때는 맞다"입니다. 맞고 틀리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이 영화에 대한 반응과 해석의 스펙트럼은 꽤 넓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사회 각 분야에서 제목을 차용한 글이 쏟아졌지요. 오늘은 과학사에서 이 철학을 적용해볼까 합니다.


중국에서 판매되는 식품의 성분표에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단위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열량의 단위를 '킬로줄(kJ)'이라 표현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나라를 포함한 선진국들은 '칼로리' 라는 단위에 익숙합니다. 중국은 틀리고 우리는 맞는 걸까요?

지금 우리는 '열'이 에너지란 사실을 알고 있지만, 18세기만 해도 '열'을 물질처럼 취급했습니다. 칼로리는 라틴어의 열을 뜻하는 '칼로르Calor'란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열이 빛과 같은 특별한 입자 물질이며, 원소라 여겨 '칼로릭'이라는 이름까지 붙였습니다. 지금은 틀린 것이지만 그때는 맞는 것이었죠. 그 당시 인류는 원자의 본질조차 모르고 있었지만,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은 작은 원소들의 집합이라고 여겼으며, 그 미시세계에 대해서 커다란 호기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열'에 대한 호기심처럼 미시세계인 원소를 탐구하던 활동을 '원소 사냥'이라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냥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만큼 맞고 틀림을 반복한 치열한 경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냥의 중심에는 다소 엉성하고 고집스런 천재 과학자가 있습니다. 과학사의 고비에는 대표적인 과학자들이 있지요. 중력에는 뉴턴, 상대성이론에는 아인슈타인, 전자기학에는 맥스웰과 같은 과학자가 그들입니다. 원소 사냥에서도 대표 과학자가 있습니다. 대중에게는 조금 생소한 원소의 주기율표를 만든 멘델레예프입니다. 그가 없었더라면 화학은 지금처럼 주류 과학으로 발돋움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벨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1906년에 수상 후보에 올랐지만 아쉽게 놓치고, 이듬해에는 사망했기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주는 노벨상은 물을 건너가고 말았습니다.


멘델레예프는 화학교수가 된 지 6년만인 1869년 "원소의 성질과 원자량의 상관관계" 라는 논문을 발표합니다. 이 논문은 당시 물질의 본성에 대한 지식 기반을 흔드는 논문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때는 원자의 정체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원자의 본질도 모르고 만든 주기율표가 맞았다면 뭔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겠지요. 사실 주기율표가 온전한 그의 작품만은 아닙니다.


멘델레예프 이전의 독일 화학자 요한 되베라이너는 '스트론튬' 원소를 연구했습니다. 무게는 정확히 칼슘과 바륨의 중간이고, 화학적 성질은 두 원소의 혼합물 같았습니다. 그는 이런 '세 쌍 원소'가 더 있는 지 연구했습니다. 오늘날 주기율표의 기둥처럼 같은 속성을 이루는 세 쌍의 존재를 탐색한 것이죠. 이렇게 최초의 주기율표는 되베라이너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세 쌍의 원소에 대한 연구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연금술과 피타고라스에 영향을 받은 화학자들은 모든 원소들의 질서를 찾기보다 세 쌍의 원소 개념이 적용되는 사례만을 파고들었습니다. 여태까지 것만 옳다 믿고 틀릴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네 쌍 원소'이론이 나오며 원소의 주기적 성질이 본격적으로 언급됩니다.


시간이 흘러 엉뚱하게도 어떤 지질학자가 '땅의 나사'라는 개념을 내놓습니다. 원기둥 표면 나사 홈에 원소를 원자량 순으로 배열하면 수직선상에 있는 원소들은 같은 화학적 속성을 가진다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과학에 서열이 있었습니다. 이 서열은 편견을 만들었죠. 물리학과 수학의 지위는 화학의 상위였고, 지질학은 그 아래의 취급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지질학자 의견은 서열이 낳은 편견에 의해 배척과 무시를 당했을 겁니다.


멘델레예프가 교수로 부임한 해에 어느 영국의 화학자는 '옥타브 법칙'을 내놓습니다. 원소를 질량 순서로 정렬하면 성질이 닮은 원소가 여덟 번째마다 나타나고 마치 음계의 한 옥타브와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애석하게도 이 법칙은 가벼운 원소인 칼슘까지만 통합니다. 원자의 구조를 모르니 무거운 원소에는 적용이 안 됐지요. 입시 준비를 하는 학생들이 외우고 있는 주기율표 원소가 칼슘까지입니다. 마치 틀린 주기율표를 외우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요. 드디어 멘델레예프가 논문을 발표합니다. 이 논문으로 이전의 모든 '주기성'이란 지식은 틀린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멘델레예프가 맞을까요?


그가 만든 주기율표도 지금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멘델레예프는 천재였지만 고집도 셌죠. 당시에 알려진 원자량 중에 주기율표와 맞지 않는 원소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기율표가 맞고 원소의 원자량이 틀렸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심지어 일부 원소들을 주기는 건너뛰게 배열했고 일부는 빈칸으로 남겨두기까지 했지요. 분명 빈 칸을 채울 원소가 더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이론 대부분은 맞았습니다. 그는 원자의 정체도 모른 채 정답을 맞힌 운 좋은 천재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주기율표는 그 뒤로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됩니다. 주기율표는 세로였다가 지금의 가로 모양으로 바뀝니다. 화학자들은 40년 동안 원소들의 위치를 바꾸면서 주기율표를 수정합니다. 원자량의 순서가 주기와 맞지 않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원자량 순서가 맞지 않는 것은 두루뭉술하게 원자번호를 붙여 위치를 정했습니다. 화학자들에게 원자번호는 그저 순서일 뿐 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물리학자가 이 의미를 해결했습니다. 물리학이 주기율표에서 원소의 위치를 원자량이 아닌 원자핵의 양성자 수라고 분명한 의미를 찾아냅니다.


당시 학계는 원자론조차 확실한 게 아니어서 원자론을 믿지 않는 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화학과 물리학에서 원자를 대상으로 연구를 지속했습니다. 화학자들은 원자들 간 결합과 관계에 집중했고, 물리학자들은 원자 내부의 구성입자를 연구했습니다. 물리학은 양자역학이라는 분야로 넓혀 갑니다. 양자역학의 등장은 모호하고 진부한 화학을 물리학 분야로 끌어들입니다. 순조롭게 나아가던 멘델레예프의 원자론은 죽어가고 있으며, 물리학의 양자역학이 과학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물리학의 압승이었지요. 하지만 멘델레예프가 이론에서 지고 틀린 걸까요?


과학자가 자신의 이론이 맞는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결론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실패하는 것이 '맞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틀림의 부재가 '맞음'을 증명하지만, 틀림의 존재가 새로운 '옳음'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맞다와 틀리다의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어쩌면 지금은 맞고 그때가 틀렸다는 말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는 말은 동어반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일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는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되베라이너처럼 세 쌍의 원소가 틀림없다는 생각에서 의심을 품지 않고 '틀림'을 찾지 않았던 시간보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며 '틀림' 을 찾아내는 시간 때문에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합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사실을 옳고 그름의 프레임에 갇혀 의심조차 하지 않지 않는다면, 다른 진실을 만나지 못하고 거부하는 맹신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김병민 과학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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