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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 신라는 왜 강대국 당나라를 공격했을까

최종수정 2017.05.31 15:22 기사입력 2017.05.31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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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소성 전투

매소성 전투


670년 3월, 2만 병력이 전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목표는 오골성(烏骨城). 옛 고구려의 군사 요충지로서 지금의 중국 요녕성(遼寧城) 봉성진(鳳城鎭)이다. 요동은 신라가 건국된 이래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땅이었다. 신라의 설오유(薛烏儒) 장군과 고구려 부흥군의 고연무(高延武) 장군이 각각 1만 명씩 거느리고 요동을 선제공격했다.

 이 전격작전으로 나당전쟁(羅唐戰爭)이 시작되었다. 앞서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상황에서 당은 신라의 기습공격을 받게 되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다고 믿고 있던 당에게는 충격이었다. 약소국 신라는 왜 최강대국 당에게 덤벼들었던 것일까?

 신라가 나당전쟁의 포문을 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 이후부터 669년까지 집중적으로 전쟁준비를 했다. 대사면(大赦免)을 내려 민심을 수습하고, 전국 170여 곳의 목장을 재분배해 기병을 강화했다. 요동 공격군을 편성하고, 고구려 부흥군과 연합을 모색했다. 요동 공격군의 장수는 비진골 출신의 설오유가 임명되었으며, 주력 병력은 고구려 멸망 당시 포로로 삼았던 고구려 군사들로 채워졌다. 요동 공격을 위해 이 지역의 지리와 정세를 잘 아는 특수부대가 편성되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자 나당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당은 옛 백제지역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했고, 옛 고구려지역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했다. 신라 입장에서 볼 때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전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최강대국 당과 국경을 직접 맞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은 한반도 전체에 당 중심의 지배질서를 관철하고자 신라를 압박해왔다. 반면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을 포섭해 나가면서 당의 지배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670년 3월에 사찬 설오유가 고구려 부흥군 고연무와 함께 각각 정병(精兵)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다. 4월 4일에 말갈(靺鞨) 군사들과 싸워 크게 이겼으며 목벤 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의 군사들이 계속 도착하자 물러나 백성(白城)을 지켰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부정했다. 2만 병력이 황해도와 평안도를 지나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들이 건넌 강은 압록강이 아니라 대동강이라고 보았다. 당시 설오유 장군과 고연무 장군이 건넌 강은 분명 '압록강'으로 표기되어 있다. 2만 병력이 향한 '옥골(屋骨)'은 바로 오골성(烏骨城)이다. 일본학자들은 신라군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축소ㆍ왜곡하였고, 신라의 요동 선제공격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신라는 요동의 오골성(봉황성)을 선제공격하여 나당전쟁의 주도권을 차지했다. 당의 이목은 모두 요동으로 쏠렸다. 이 때 남쪽에서는 진골 귀족이 이끄는 신라 주력군이 움직였다. 이들이 향한 곳은 웅진도독부가 설치된 옛 백제 지역이었다. 670년 7월, 신라는 일시에 웅진도독부의 82성을 함락시켜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고, 이듬해에는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여 영역화했다. 이제 옛 백제지역은 신라의 손아귀로 들어왔다.

 신라의 요동 선제공격은 신의 한수였다. 당은 북쪽 옛 고구려지역에 신경 쓰느라 남쪽 옛 백제지역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신라는 이 틈을 노려 전격적으로 웅진도독부를 차지했다. 원래 신라가 당과 전면전을 치르기 위해서는 북쪽의 안동도호부, 서쪽의 웅진도독부를 모두 감당해야만 했다. 이 상황에서 특수부대로 요동을 공격하여 당의 이목을 돌린 후, 주력부대로 웅진도독부를 전격적으로 장악했다. 이제 신라 서쪽의 방어전면이 사라져 버렸다. 신라는 서쪽 방어전면을 지키던 병력까지 북쪽으로 전환시켜, 당군의 남하에 대비할 수 있었다. 만약 신라의 웅진도독부에 대한 점령이 늦어지고 당군의 병력이 증원되었다면, 신라의 나당전쟁 승리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모든 것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642년, 백제 의자왕은 신라 서부의 40여 개 성을 공략했다. 신라 선덕여왕 때의 일이다. 대야성(경남 합천)이 백제에 넘어가면서 신라는 위기에 빠졌다. 이 지역은 대부분 옛 가야권역으로 신라 영토 4분의 1에 해당했다. 대야성에서 동쪽으로 낙동강을 건너면 달구벌(대구)과 서라벌(경주)이 코앞이었다. 백제의 대야성 함락은 신라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신라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은 김춘추였다.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심으로 하는 신귀족 세력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고자 했다. 고구려로 가기 전 김유신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공(公)과 일심동체로 나라에서 가장 신뢰받는 신하가 되었소. 지금 내가 만일 고구려에 들어가 해를 당한다면 공은 어떻게 하겠소?" 김유신이 답했다. "공(公)이 만일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 두 임금의 앞마당을 짓밟을 것이오." 김춘추가 감격하여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김유신도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술잔에 피를 떨어뜨려 서로 나누어 마셨다. 당시 김춘추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다.

 고구려의 집권자는 연개소문이었다. 연개소문은 죽령(소백산맥) 이북의 땅을 고구려에 넘겨주면 신라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김춘추와 연개소문 사이에 치열한 외교 신경전이 벌어졌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김춘추는 감옥에 갇혔다. '토끼와 거북이' 일화를 일러준 선도해(先道解)의 도움으로 김춘추는 고구려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한강 유역은 원래 고구려 땅입니다. 제가 귀국하면 고구려에 돌려주도록 청하겠습니다." 물론 신라는 김춘추가 귀국한 후 죽령 이북 땅을 고구려에 돌려주지 않았다.

 647년, 김춘추는 왜로 건너갔다. 우리 역사서에는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묘사되어 있다. "김춘추의 용모와 자태가 수려하고 화술에 능하다." ≪일본서기≫의 신라관에 비추어 보면, 이례적인 호평이라 할 수 있다. 김춘추가 왜의 지배층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증거다. 당시 김춘추가 왜에서 어떠한 행적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다만 친백제 성향의 왜가 신라 입장에 흔쾌히 동조했을 가능성은 없다.

 648년, 김춘추는 다시 당으로 건너갔다. 앞서 당은 645년 고구려 원정에 실패했다. 이후 소규모 군사를 동원해 고구려에 자주 침입하면서 소모전을 전개하던 중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고구려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김춘추는 당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당 태종은 김춘추와의 만남을 통해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와 앞으로의 변화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김춘추가 당으로 건너갈 당시 신라와 당의 관계는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지만, 서로 추구하는 목적이 달랐다. 신라는 백제의 공격과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당은 고구려의 멸망을 바라고 있었다. 관심 대상이 서로 달랐다. 신라와 당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고 합의점을 도출해야만 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신라와 당이 한반도 문제에 서로 힘을 합치기로 했다. 다음으로 신라가 백제를 공격할 때 당이 지원하고,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가 후원하는 방식으로 얘기가 진행되었다. 나아가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의 상황까지 논의되었다. 대동강을 기준으로 이북은 당이 차지하고, 이남은 신라가 영유하기로 합의했다. 각각 백제와 고구려라는 상대에 대한 전략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마침내 나당동맹이 체결되었다.

 신라는 당과 함께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자 나당동맹은 곧바로 와해되었다.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신라와 당이 대립했기 때문이다. 당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신라를 철저히 무시했다. 당은 신라의 인물을 뽑아 당군의 장수로 임명하고 신라왕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신라에서 병력을 임의대로 징발하여 당군에 편입시키기도 했다. 또한 전투과정에서는 신라왕에게 정보 전달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전투계획 수립은 당군이 전담했다. 나당동맹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평등관계는 종속관계로 이행되고 있었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멸망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익(영토)은 아무 것도 없었다. 648년 당 태종과 신라 김춘추가 나당동맹을 맺을 때, 당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면 대동강 이남의 땅은 신라에게 넘겨준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당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신라의 불만은 점점 누적되었다.

 당이라는 거대제국의 위압감은 신라를 옥죄어 왔다. 당의 속국으로 전락하느냐 아니면 맞서 싸우느냐 선택의 기로에 섰다. 결국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고려하게 된다. 정확한 국내외 정세판단과 과감한 결단 그리고 치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약소국 신라는 최강대국 당과의 7년 전쟁에서 승리하며 한반도를 지켜냈다.

이상훈 경북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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