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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필연적 우연, 과학 속 '세렌디피티'

최종수정 2017.05.24 17:16 기사입력 2017.05.2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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눌어붙지 않는 프라이팬 냉매 개발 실패해 찾았다

김병민

김병민

풋사과 같은 청춘의 어느 날 한 사람이 가슴에 찾아옵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유독 한 여학생이 자주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왜 그렇게 눈에 자주 보이는지, 그리고 그 마음이 어떤지 잘 몰랐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 사람이 보고 싶었습니다. 그 여학생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짧은 쉬는 시간이거나, 어쩌다 겹치는 체육시간, 그리고 방과 후 자습실이었습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 그 시간, 그 장소의 그녀 앞을 일부러 지나쳤던 어색한 행동들이 생각납니다. 우연히 마주치면 자연스럽게 그녀도 내 존재에 익숙해지고 겹쳐진 우연은 운명이 될 수도 있다고 믿었던 서투른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운명의 모습을 한 우연은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철부지 청춘은 가슴이 아프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고 체념을 배우게 됩니다. 제게 첫사랑은 이렇게 용기 없고 비겁한 생각과 행동으로 찾아왔습니다.

 살다 보면 '우연'을 기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권 당첨을 기대하고, 버스나 기차에서 우연한 인연을 기대하고, 어쩌다 풀었던 문제가 시험에 나오길 바랐던 적이 있습니다. 우연이라는 메커니즘 안에는 '확률'이라는 엔진이 작동합니다. 확률은 수학적 개념이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확률을 기대하는 경우는 도박보다 별반 나아 보이지 않습니다. 결과를 얻기 위해 들이는 노력에 비해 큰 성과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연은 인과관계가 없을까요?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제 그 우연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과학사에서 과학적이지 않은 단어가 바로 '세렌디피티(serendipity)' 입니다. 위대한 발견은 과학자가 수많은 실패와 연구를 하며 얻어진 결과입니다. 그런데 '세렌디피티'는 엉뚱하게도 계획에도 없고 예상하지도 못한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되는 행운을 말합니다. 이 말은 1754년 영국 출신 문필가인 호레이스 월폴이 '세렌딥의 세 왕자'란 동화에 감동을 받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래합니다. 동화 속 왕자들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여러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세렌딥'은 스리랑카의 옛 이름이고 이후 사람들은 이 단어를 행운이 따른다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과학사에는 '세렌디피티'가 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포스트잇 메모지나 코팅 프라이팬, 그리고 물에 뜨는 비누도 우연한 발견입니다. 심지어 많은 인류의 고통을 구한 페니실린과 아스피린도 '세렌디피티' 결과입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를 보겠습니다. '음식물이 잘 눌러 붙지 않는 프라이팬'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있습니다. 상품명인 테팔(Tefal)이라는 이름은 프랑스 주방가전 회사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 이름은 '테플론'과 '알루미늄'을 조합해서 만든 겁니다. 알루미늄 팬에 테플론이라는 물질을 입혔을 뿐인데, 조리한 음식이 잘 눌러 붙지 않습니다. 이것이 테플론의 성질입니다.

 사실 '테플론'은 처음부터 연구를 계획한 물질이 아닙니다. 1930년 초 미국 GE 사가 냉장고에 사용할 냉매를 개발하기 위해 듀퐁 사와 합작회사를 만들고, 화학자인 로이 플렁킷이 연구책임자를 맡았습니다. 플렁킷 박사는 테트라플루오로에틸렌(C2F4)을 염산과 반응시켜 독성이 없는 새로운 냉매인 '플루오르 카본'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1938년 어느 날 플렁킷 박사는 실험을 위한 테트라플루오로에틸렌 기체를 실린더 통에 넣어 일정 압력을 유지하고 팽창을 막기 위해 드라이아이스를 이용해 온도를 낮춰 보관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실린더 통을 확인하자 기체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처음에는 실린더 통이 새서 기체가 전부 날아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무게를 재어 보니 기체가 담겨 있던 무게와 같았고, 출구 밸브에도 이상이 없었습니다. 아마 저라면 다른 기체를 사용하려고 그저 실린더 통을 바꿨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냉매 연구보다 이런 신기한 현상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다시 여러 차례 확인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실린더 통을 잘라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작고 미끄러운 흰색 왁스 조각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기체 물질이 새로운 물질이 되었다고 생각 못했습니다.

[김병민의 사이언스 빌리지]필연적 우연, 과학 속 '세렌디피티'
 이런 물질이 만들어진 이유는 특정한 압력과 온도에서 기체가 서로 합성되어 고분자 플라스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플렁킷은 곧 이 물질이 아주 흥미로운 성질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물질은 미끄러운 성질 외에 용매에도 잘 녹지 않고, 산과 염기에도 강했습니다. 심지어 열에 강하고, 분해도 안 됐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여러 개 분자가 사슬처럼 붙어 고분자처럼 되었다는 의미로 '폴리(Poly)'라는 접두어를 붙여 '폴리테트라플루오로에틸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상품화한 이름이 '테플론(TEFLON)' 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연한 발견으로 과학사에서 대표적 '세렌디피티'로 불리기엔 무언가 부족합니다. 여기에 우연이 하나 더 찾아옵니다. 이쯤 되면 우연인지 운명인지가 혼란스럽습니다. 당시 이 고분자 물질이 가진 특이한 성질에도 불구하고 연구를 계속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이 물질은 제조하기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들어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바로 이듬해인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 미국에서 원자폭탄 연구가 진행이 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유명한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입니다. 폭탄 제조에는 우라늄-235가 사용이 되는데, 이 우라늄 동위원소 제조에는 6플루오르화우라늄이라는 부식성이 엄청난 기체가 사용됩니다. 결국 이 가스를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강한 노즐과 밸브가 필요했습니다. 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들어야 할 미국으로서는 큰 기술적 장벽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자폭탄 계획 책임자가 우연히 듀퐁 사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고분자 플라스틱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됩니다. 덕분에 미끈거리는 플라스틱은 연구가 계속되고 전쟁 후까지 이 물질은 우라늄 제조에만 사용됐습니다.

 실제로 테플론이 일상생활에 들어오기 시작한 시기는 1960년부터입니다. 물론 그 뒤에도 거듭되는 실패와 연구를 통해 현재 테플론으로 발전됐습니다. 테플론은 주방기기 외에도 신체 안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장점 때문에 인공기관이나 인공뼈에 사용되며 의학기술에 응용됩니다. 또한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강렬한 복사열에 견디기 때문에 우주항공 분야에도 사용됩니다. 우연한 발견이 세상을 바꾼 경우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발견은 정말 우연일까요, 아니면 필연일까요? 75억 명 인구 중에 어느 젊은 남녀 한 쌍이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아이가 생기는 일도 그 시작과 모든 과정이 우연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에게 벌어진 모든 상황을 결정론으로 해석하기 좋아합니다. 필연이라고 포장을 해야 특이점이 생깁니다. 관계가 특별해집니다. 그 많은 확률에서 우연히도 만난 사람들이 소중히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초기 우주에서 양성자와 중성자가 떠돌다가 충돌해 핵을 만드는 경우도 우연입니다. 상상해 봅니다. 엄청난 온도와 에너지로 가득한 '플라즈마 스프'라고 하는 상태에서 이 둘은 떠도는 게 아니라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다가 둘이 우연히 만납니다. 하지만 두 입자가 가진 속도와 힘, 그리고 방향은 미리 계산된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비현실적 낙관론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스타가 될 수 없고 벼락부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사실 양성자와 중성자가 충돌하며 수소 핵이 만들어지는 사실이 우연 같지만 충돌 전에 두 물질이 가진 속도와 힘 그리고 방향이 있었습니다. 인생에서도 우리가 무언가 일어나길 원한다면 그에 적합한 속도와 힘과 방향을 가져야 합니다. '세렌디피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연한 발견과 같은 행운에는 끊임없는 실패가 있었고, 그 실패에도 지치지 않고 연구를 거듭했으며, 실패 원인을 들여다보는 눈과 사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30년 전 비굴한 우연에 기대지 않고 그 사람을 향한 속도와 힘과 방향을 가졌더라면 지금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고 생각하며 미소 지어봅니다.

김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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