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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 사드보복과 抗美援朝

최종수정 2017.05.11 17:57 기사입력 2017.04.2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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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사드노이로제는 내부의 불안정을 외부로 표출하는 징표

중국영화 <我的戰爭>의 한 장면

중국영화 <我的戰爭>의 한 장면


십년 전 일이다.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시안(西安)까지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복도칸에서 담배를 피우던 한 무리 중국인들을 만났다. 한 명이 한참 노려보더니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You! Japanese?" 짧은 중국어로 답했다. "한국 사람입니다." 순간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어느새 내 손에는 그들이 건넨 담배가 쥐어져 있었다.

중국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는 '반일(反日)' '항일(抗日)'이다. 일본의 난징(南京) 대학살이나 731부대 만행은 악감정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하다. 베이징 교외에는 루거우차오(蘆溝橋)가 있다. 1937년 7월 발생한 루거우차오 사건은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인근에는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中國人民抗日戰爭記念館)이 있다. 수많은 중국 학생들과 일반인들이 거쳐가는 곳이다.

내부 분열은 외부의 강한 적이 등장했을 때 일시적으로 봉합된다. 지금껏 중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듯이 가장 만만했던 것이 '반일' '항일' 구호였다. 중국은 연수입 2300위안(약 38만원) 미만의 절대 빈곤 인구가 수천만 명에 달하고 1억명이 넘는 55개 소수 민족을 거느리고 있다. 동부 해안지역과 서부 내륙지역의 격차도 크다. 원심력이 강한 중국 입장에서 내부 결속을 위해 일본만한 소재도 없다.

국내에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해 9월 중국에서 '나의 전쟁(我的戰爭)'이란 영화가 개봉했다. 중국군의 한국전쟁(1950~1953) 참전을 다루고 있다. 시대 고증이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주목할 부분이 많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참전 군인을 가득 태운 기차가 개선문을 통과하며 붉은 꽃가루가 수없이 휘날린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한국전쟁에 대한 자막이 차지했다.

"1950년 10월8일, 중국은 조선(북한)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 참가했다."
"항미원조의 승리는 미국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 기도를 분쇄하고, 새로운 중국의 안전을 보장했다.“
영화 속에 한국군이나 북한군은 등장하지 않는다. 우월한 미국에 맞서 열악한 중국이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는지 끊임없이 보여준다. 장엄한 음악과 함께. 영화 속 중국은 북한의 종주국이자 후원국이다. 중국인들은 이 전쟁을 '항미원조'라 부른다. 미국에 대항하면서 조선을 돕는다는 의미다. 임진왜란(1592~1598)을 '항왜원조(抗倭援朝)'라 부르는 것과 같다.

지난해 9월5일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은 "사드의 한국 배치는 지역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고 분쟁을 격화시킬 수밖에 없다"며 사드 배치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영화 '나의 전쟁'은 중국의 공식적인 반대 표명 직후 개봉했다. 시진핑 발표 이후 10일 만의 일이다.

중국은 1979년부터 2010년까지 눈부신 속도로 성장했다. 이 기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연 평균 10%가 넘었다. 2010년을 전후해 일본의 GDP를 추월하면서 단숨에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경제 파이는 커졌지만 부의 분배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도시와 농촌의 불균형은 심화되고 개인별 빈부 격차는 상상을 초월한다.

더 큰 문제는 소수 민족의 동향이다. 1000만명이 넘는 신장(新疆) 위구르족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독립 요구가 격화되면서 수백 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위구르족과 이슬람 무장단체 IS의 연계도 모색되고 있다. 최근 중국은 쓰촨성(四川省) 거주 티베트인들에게 모국어 사용을 금지시키고 여권 발급과 해외 출입국 심사를 강화했다. 500만명이 넘는 시짱(西藏) 티베트족의 반중(反中) 감정도 문제다.

이번 사드 사태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비교된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 사이에 발생한 미사일 위기와는 그 결이 다르다. 미국 플로리다 반도에서 약 300㎞ 떨어진 쿠바에 소련의 미사일 기지가 건설되면 미국에 실질적 위협이 된다. 한국에 배치되는 사드는 기본적으로 방어용이다.

중국은 비정상적 여론 몰이와 전방위적 경제 보복을 하고 있다. 중국은 왜 사드 배치에 극단적 선택들을 하는 것일까. 사드는 한국이 아니라 미국의 의지에 따라 배치된다는 사실을 중국도 알고 있다. 여기가 급소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 중국을 '위협'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지난해 11월 위대한 미국을 강조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과 이번 사드의 한국 배치는 중국내 '미국 공포'를 확산시킬 수 있는 좋은 계기다.

이들 목소리는 외부를 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내부를 향하고 있을지 모른다. 중국 내부의 불안정과 불안감을 외부로 표출시키는 것이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서 북한 문제에 개입할 명분을 만들고 사드 반대를 통해서 국내 문제를 수습한다. 양면전술이다. 중국의 구호는 '반일' '항일'에서 '반미' '항미'로 변화하고 있다.

사드를 계기로 미국과 중국의 힘겨루기가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다.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완충국은 경제력이나 군사력에 따라 그 역할이 달라진다. 완충국의 군사력이 약하면 완충 효과는 거의 없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강대국들의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다. 임진왜란 때 '정명가도(征明假道)'처럼 침략을 위한 통로가 되거나 전장(戰場)이 될 수밖에 없다.

1882년 신식 군대와 구식 군대의 차별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했다. 진압할 엄두를 못내던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했다.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인 청나라는 군란을 진압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조선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청나라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1884년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청군은 병력을 동원해 신속히 정변을 진압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조선을 두고 청나라와 일본의 경쟁은 한층 치열해졌다.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을 벗어나고자 러시아에 접근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영국이 나타났다. 1885년 영국은 러시아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했다. 경제력과 군사력이 빈약했던 조선은 청ㆍ일ㆍ러ㆍ영 등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돼버렸다.

1894년 전봉준이 중심이 된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이 발생했다. 조선 정부는 다시 청군을 불러들였다. 일본은 청군을 견제하기 위해 신속히 대규모 부대를 조선에 파병했다. 이 사건은 조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청일전쟁(1894~1895)으로 비화되었다. 이후 러일전쟁(1904~1905)을 거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극대화되었고 5년 뒤 조선은 일본에 강제 합병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는 감국대신(監國大臣)으로 조선에 와 있었다. 그는 1886년 7월 '조선대국론(朝鮮大局論)'이라는 글을 써서 의정부(議政府)에 보냈다('고종실록' 고종 23년 7월29일).

"조선은 영토가 3000리에 불과하고 인구는 1000만명이 안 되며 부세도 200만석이 안 된다. 군사도 수천 명에 불과하니 모든 나라들 중에서도 가장 빈약한 나라이다."
"조선은 본래 중국에 속해 있었는데, 지금 중국을 버리고 다른 데로 향하려 한다면 이것은 어린아이가 자기 부모에게서 떨어져서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상훈 경북대학교 연구교수


[이상훈의 한국유사] 사드보복과 抗美援朝
이상훈 교수는 전쟁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자다. 학군ROTC 37기로 임관하여 육군 중위로 전역한 후 경북대학교 대학원 사회교육학과(역사)에서 〈나당전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에서 연구교수로 일하고 있다. 인문학의 대중화에 관심이 많아 대구경북인문학협동조합에서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전략전술의 한국사》, 《나당전쟁 연구》, 《신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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