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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칼럼] 할아버지가 살아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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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경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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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외할아버지는 해방 후 일자리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다 영영 북에 돌아가지 못했다. 역시 평안도 출신의 외할머니를 만나 3남매를 뒀지만 빈손으로 시작한 서울살이는 동업자에게 사기까지 당하면서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태원 작은 셋방에서 할머니가 하루 종일 재봉틀 두 대를 놓고 점퍼와 트레이닝복을 만들면 할아버지가 이를 미군부대에 갖다 팔아 생계를 꾸리셨다. "금강산 관광은 천천히 가지" 하셨지만 어느날 갑자기 다시 막혀버렸고, 맛집으로 꼽히는 유명 평양냉면 식당에선 이북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니라며 고개를 저으셨다.

첫 손녀였던 나에게 어린 시절 할머니가 들려주던 전쟁의 참상은 무시무시했다. 신의주 어디 쯤에서 한밤중 배를 타고 몰래 피난길에 올랐는데 일행 중 갓난아기가 울어대자 발각돼 모두 죽게 될까봐 엄마가 아기를 바다에 던져버렸다는 이야기는 3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슴이 미어지는 비극이다.
하긴 80년대 후반 국민학교에서는 6월이면 '늑대골의 특등사수'와 같은 반공도서를 읽고 독후감을 쓰거나 통일을 목청껏 외치는 웅변대회가 있었다. TV 뉴스에서 63빌딩이 절반이나, 한강 다리들은 흔적도 없이 물에 잠기는 모형을 보여준 다음 날 '평화의 댐 성금'이라며 500원을 냈던 기억이 뚜렷한데 이제 와 그것이 대국민 사기극이었다고 한다. 학교에 가지 않았던 어느 토요일엔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호외가 골목길까지 뿌려졌고, 대학 1학년 교양수업 시간엔 탈북자 출신 교수님이 직접 강의를 하셔서 흠칫했다.

할머니가 왜 어린아이에게 그런 끔찍한 피난 이야기를 하셨을까 궁금했는데, 한참 후에야 영화 '국제시장'을 보다 그 의문이 풀렸다. "그렇게 목숨 걸고 내려와서 너희가 태어난 거니, 좋은 세상에서 잘 살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지난달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처음으로 만나던 그 순간, 우리는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는 그 말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하지만 그날이 평소보다 조금 더 특별했을 뿐, 이미 우리는 역사를 살아오고 있었다. 나의 할아버지가 살아낸 한 세기가 바로 우리 현대사였고, 할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전쟁의 상흔 하나하나는 삶에 각인된 역사였다.
실향민의 자식이었던 우리 부모님이 겪어온 시절, 그리고 내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 하루는 그 아픔에서 무뎌졌을 뿐 분명 그 역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아직 그 뜻도 모르는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엄마, 통일되면 군대 안가도 되는거지?"라며 요즘 유튜브에서 유행한다는 '군대영장송'을 흥얼거리는 걸 보면 다음 세대에서 우리의 역사는 또 어떻게 적힐지 진심 궁금해진다.

남과 북의 정상이 마주한 바로 그 전날, 할아버지를 경기도 파주 끝자락에 마련된 실향민들을 위한 추모공원에 모셨다. 임진강 너머 북한 땅이 바라보이는 그곳에서 어르신들은 마지막 가는 길에도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고향별로 나눠 정해진 자리에 묻혔다. 한반도에 봄 기운이 활짝 피어나던 날, 할아버지는 하늘 가는 그 길에서 북녘 고향을 잠시 둘러보고 가셨을까.

조인경 사회부 차장 ikjo@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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