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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블로그]'임대주택 포비아'와 '강남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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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철응 기자]기자를 찾는 독자의 전화는 대개 호의보다는 항의나 불만의 표시일 경우가 많다. 수서역 인근 주민의 전화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 역시 그러하리란 예감이 강했다.

서울시가 강남 수서역 인근 KT 전화국 부지를 사들여 임대주택을 지으려 하자 강남구가 KT에 공문을 보내 부지 매각을 만류하고 있다는 기사를 쓴 직후였다. 수화기에선 달뜬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흘렀다. 예상처럼 화를 내지는 않았으나 그는 정말로 불안해 하고 있었다.
“임대주택을 짓는다는 게 진짜에요?” “네, 서울시에서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요? 어떻게 해야 막을까요?” 번지수를 잘못 찾은 생뚱한 질문이었지만 성실히 답변하려 노력했다. “글쎄요, 뭐 서울시에다 반대 의견을 적극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 있겠지요.”

그러다 불쑥 물었다. “임대주택, 그게 그렇게 들어오면 안 되는건가요?” “아이구, 안 되지요. 여기 임대주택 너무 많다구요. 어떻게 또 짓는단 말이에요.” 내친 김에 정중하게 한 번 더. “너무 많으면, 많이 곤란하신가요?” “당연하지요. 안 돼요, 안 돼. 무조건 안 돼요.” 통화를 끝내면서 ‘포비아’라는 말이 떠올랐다. 특정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불안증이다.

서울시나 SH공사에서 임대주택 업무를 담당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어려움을 호소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2018년까지 임대주택 8만호 공급을 공언해 놨는데 적당한 부지 찾기와 재원 확보도 그렇지만 번번이 나오는 반대 민원을 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임대주택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캠페인이라도 하고 싶다는 하소연을 하는 경우도 있다.
수서역 공영주차장 부지에 지으려는 44가구의 행복주택(대학생·사회초년생·신혼부부용 임대주택) 역시 인근 주민들과 강남구의 반대로 진척이 되지 않고 있다. 수서역 주변은 각 정당들의 홍보용에다 임대주택 반대가 더해져 현수막이 넘쳐난다.

선거로 대표를 뽑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원은 힘이 세다. 서울시의회는 ‘갈등을 줄이고 합의에 통한 사업 추진’이라는 지난한 과제를 제시하며 수서역 행복주택 사업안을 보류시켜 놓은 상태다. 서울시 소유 부지를 SH공사에 현물 출자하는 방식이어서 의회가 동의하지 않으면 사업을 할 수 없다.

이른바 ‘좋은 동네’는 교통이나 학군 외에도 ‘수준’을 따지는 게 세태다. 저소득층 서민들이 사는 임대주택이 들어오면 “동네 질 떨어진다”는 게 적나라한 심경인 것 같다. 놀라운 것은 거대 여당 대표의 생각도 궤를 같이 한다는 점이다. “전국이 강남만큼 수준 높으면 선거 필요도 없다”고 했다니 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한 '강남 수준'에 임대주택 거주자들은 제외될 것이다. 숨기고 다독여야 하는 것으로 알았던 노골적인 감정의 표현들이 백주대낮에 횡행하고 있다.

도덕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임대주택 포비아는 바람직하지 않다. 변두리에 임대주택을 몰아서 지어 물과 기름처럼 분리시킨다고 해보자. 이는 극심화 계층화이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협하는 최대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삶은 선택의 문제일 수 없다. ‘합리적 보수’를 자처하는 한 지인의 말이다. “안 돼요. 당장은 따로 떨어져서 사니까 좋을 지 몰라도, 자꾸 분리시키면 우리도 결국 못 산다니까요.” 모든 보수가 곱씹어봤으면 좋겠다.






박철응 기자 her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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