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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칼럼] 키보드 두드리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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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귀에 도청장치가 있어요."


1988년 MBC 간판 뉴스 시간에 한 남자가 스튜디오로 뛰어들어 당시 유명한 앵커의 귀에 대고 소리를 쳤다. 이 사고는 자기 귀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믿는 청년이 MBC 생방송 중에 침입한 사건이다. 나는 이 청년이 1990년대까지도 광화문 프레스센터 주변에서 똑같은 말을 하며 돌아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MBC 방송 사고의 불명예스러운 역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PD수첩'에서 종교 지도자를 고발하는 방송이 나가던 날 교회 신도들이 주조정실에 난입해 방송을 중단시켰다. 그날 방송에서는 'PD수첩'의 '목자님 우리 목자님' 편이 나오다가 비상사태 시를 위해 준비된 영상인 '자연 다큐멘터리'의 푸른 초원 위에서 얼룩말이 뛰노는 모습이 번갈아 방송되는 '신박한' 편성 기법이 선을 보였다.

KBS에서는 '공개수배 25시'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사회자가 진행에 열중한 나머지 스튜디오에서 의자가 뒤로 빠진 것도 모르고 털썩 앉다가 엉덩방아를 찧는 게 그대로 전파를 탄 적도 있다. 서울에 폭설이 내리던 어느 날 KBS 기상 뉴스를 전하면서 눈사람이 되어가던 현장기자의 모습도 많이들 기억할 것이다.


뉴스 사고가 어디 새로운 문제일까. 그런데 아날로그 시대의 뉴스 사고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다. 열심히 현장에서 취재를 하다 보니, 거센 저항을 받으면서도 사회 고발 기능을 하다 보니, 그도 저도 아니면 웃음 앞에 와르르 무너져버린 인간미라고 할 수도 있겠다.


디지털 세상에서 뉴스 사고는 어이가 없는 데다 이상하리만큼 반복된다. 전직 대통령의 그림자 이미지는 인기 연예인 친부 논란 뉴스부터 방탄소년단 소속사의 마케팅 논란 뉴스에까지 끊임없이 재활용되고 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욕하는 일베 합성 사진들도 잊을 만하면 뉴스 보도에 사용해 문제가 된다. 문재인 대통령 사진 앞에 북한 인공기를 배치하지를 않나, 김정숙 여사를 김정은 여사라고 보도하거나 문 대통령을 북 대통령으로 내보내기까지 했다. 심지어 유명한 외신 보도를 그대로 베낀 표절 문제까지 발생했다. 이제는 단순 뉴스 실수인지 아닌지 고의성마저 의심받고 있다.

디지털 세상의 편리함으로 과거보다 기사 쓰기는 훨씬 수월해졌다. 일일이 현장에 찾아가지 않아도 자료는 넘쳐나고 모든 것이 인터넷에서 검색된다. 정보원과 직접 통화하지 않더라도 그의 입장과 의견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쉽게 얻을 수 있다. 시민들의 반응이란 거리에 있지 않고 인터넷 댓글에 있다. 다른 언론이 이미 취재한 팩트는 팩트니까 그냥 가져다 써도 부끄럽지 않다. 저작권 침해를 하지 않고 요령껏 베껴 쓰는 것도 글쓰기의 능력이다. 현장에서 발로 뛰는 기자가 아니라 인터넷 세상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기자가 됐다.


인터넷 시대에 진실 너머 스피드가 자리를 잡았다. 인쇄판이 아닌 인터넷판은 수정하기가 쉽고 기사 마감 시간의 의미는 퇴색했다. 아날로그 시대에 기자가 취재한 내용을 선배와 데스크가, 보도국과 편집국이 거르고 점검하던 촘촘한 과정이 잘 지켜질 리 없다. 디지털 기술의 편리함을 등에 업고 헐거워진 게이트키핑 과정과 언론의 도덕적 해이가 만나 어이없는 뉴스 사고를 연일 치고 있는 것이다. 가짜 뉴스를 욕할 게 아니다. 가짜 뉴스는 정치적 의도라도 있고 계획적이지만 이름난 언론사들의 뉴스 사고는 뭐라고 정의할 수 있겠는가. 사회 비판의 칼날을 이제는 냉정하게 언론 스스로 자신들에게 들이댈 시점이다.


윤성옥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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