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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어떤 귀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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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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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해외입양인 작가와 인터뷰가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미국으로 입양돼 한국계 미국인 작가가 돼 돌아온 그녀. 여러 해 전 학회에서 우리 입양 정책의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짚어내며 울분을 토하던 그녀를 기억하고 있기에 변화된 모습이 궁금했다.


몇 년 만에 만나보니 한결 밝고 편안해 보였다. 엄마가 돼 정신없이 산다며 웃었다. 자신을 버린 땅에 돌아와 싱글맘으로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녀는 북녘이 고향인 아비의 다섯째 딸로 태어났다. 아들을 기다리는 아비의 긴 기다림 끝의 다섯째 딸.

집안의 대를 잇지 못하는 쓸모없는 존재, 가부장적 사회에서 딸은 자주 그렇게 인식됐다. 그리하여 그녀는 입양이라는 호혜적인 시혜의 대상이 돼 낯선 땅에 이식됐다. 백인 양부모의 보살핌이 다 살피지 못하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또 다른 폭력의 대상이 된 그녀. 아메리카 인디언의 후손인 어떤 남자의 집요한 스토커 대상이 됐다.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의 가해자가 되는 구조는 어느 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사실을 예민하게 인지한 그녀이기에 폭력이 순환되는 방식에 대해 남다른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상처와 훼손 속에서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딛고 그래도 그녀는 살아남았다. 지금의 굳건함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과 아픔이 있었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해외입양인들은 우리 근대사에서 가리고 싶어도 가릴 수 없는 뚜렷한 족적, 상흔이다. 지워진 존재는 자기 핏줄을 찾아 이 땅에 돌아온다. 가끔 성공 신화로 돌아와 박수를 받기도 하지만 국적을 잃고 완벽히 보이지 않는 존재로 돌아와 이 땅에서 한 많은 목숨을 마감하기도 한다. 글쓰기라는 훌륭한 자질을 지닌 제인은 작가가 돼 돌아왔다.


자기를 낳고 버린 땅에 홀로 돌아와 엄마를 찾아 애틋한 모정을 알았지만 그 정다운 시간도 길지는 않았다. 엄마를 떠나보내고 이제 엄마가 돼 사는 그녀. "저는 한국말 잘 못 해도 제 딸은 완벽한 바이링구얼(이중 언어 구사자)이에요." 외형만 한국인이지 미국인으로 자란 그녀가 자랑했다. 한국말은 너무 어렵지만 누구보다 정확히 한국의 맛, 한국의 냄새를 잘 안다.

총기 사고 없고 버스나 지하철이 잘 돼 있어 좋은데 미세먼지가 걱정이라는 말. 봄날의 만남에서 그녀는 일상에서 누리는 이 사회의 작은 안전망에 안도했다. 그간 한국인으로서 내심 품고 있던 미안함이 조금 상쇄된 시간이었다. 적어도 제인의 딸은 더 안정적으로 이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기에. 그로부터 사흘 뒤 진주의 한 아파트에서 무차별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세상이 곪아 들어갈 때 늘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쪽은 '입이 없는' 약자들이다. 장애를 입은 이들, 정신병을 앓는 이들, 온갖 이유로 버려진 이들.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은 한 가정, 한 개인의 헌신으로 감당할 수 없다. 법을 시급히 보완하고 지방자치단체와 정부가 세금을 잘 활용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국가가 보호해야 할 대상은 가진 자들이 아니라 빈자와 약자들이다. 다섯째 딸로 태어나 버림받은 딸이 돌아와 사는 이 땅. 그녀의 책 "Fugitive Visions"는 "덧없는 환영들"로 번역됐으니 관심 있는 독자들은 꼭 한번 읽어보시길. 이 땅의 약자들이 더 살기 좋은 나라를 구체적인 비전(Vision)으로 그리고 실천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요, 책임이다.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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