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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칼럼] 사적 공간의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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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머릿속을 들여다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대학 때 첫사랑이었던 그 남자애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항상 궁금하다고 했다. 마법사의 유리구슬 같은 게 있어서 하루종일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알고 싶다고도 했다. 다 그렇듯 헤어졌고 첫사랑으로 남게 됐다. 유리구슬이 연인들에게만 필요한 건 아니다. 엄마들은 자식들이 학교 끝나고 학원을 갔는지 뭐하고 다니는지 항상 궁금하다. 서울 대치동의 많은 학원에서 아이들이 도착하거나 학원을 떠나는 순간마다 띠링띠링 엄마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는 것도 일종의 유리구슬이다.


내 또래 남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학창시절 야한 잡지나 비디오 테이프를 돌려보며 친구와 우정을 쌓았던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갖고 있다. 가끔은 누나에게 들키거나 엄마한테 걸려서 사람 취급 못받으며 집안에서 얻어터진 경험도 있을 거다. 학교 종례시간에 담임 선생님께서 집행하신 불시의 소지품 검사 때 출석부로 머리통을 맞아본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땐 그랬다.

연예인들의 성관계 동영상 사건이 터질 때마다 우리 모습이 그리 다르지 않았다. 직장 동료끼리 삼삼오오 앉아서 '세상에나 그런 일이 있었다'고 키득거렸다. 세상에나 그런 일은 그 개인의 아주 내밀한 사적 영역이다. 우리가 관여할 대상이 아니었지만 남의 불행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저 심심풀이 수다 대상일 뿐이었다. 아직 보지 못했다는 이들에게 불법동영상을 보내주고 나눠보는 건 직장동료애였다.


언론은 남의 사적 공간을 엿보는 우리를 탓하지 않았고 그런 동영상이 있는지 여부에만 펜 끝이 향했고 카메라를 들이댔다. 가여운 희생양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지금도 어디선가 그런 기록이 나올까 숨죽여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몇 해 전 법원에서 '사람의 성생활에 대한 정보는 공인이더라도 공중의 정당한 관심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결이 있었다. 성관계 동영상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영역이므로 공적 관심사안이 될 수 없다. 설사 누군가에게 성관계 동영상이 있을지 몰라도 언론보도에서 그런 내용을 다뤄서는 안 된다.


온라인이나 모바일의 단체대화방도 마찬가지다. 불특정 다수가 인지하는 언론뿐만 아니라 몇몇 사람들끼리 수다떠는 단체대화방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될 수 있다. 학교 동기들끼리 만들어 선배를 욕하는 단체대화방, 회사 동기들끼리 모여 부장님 뒷담화하는 단체대화방 등은 다 공개된 장소다. 더 이상 사적 공간이 아니다.

친구 또는 연인끼리의 1대 1 비밀대화방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인데 스포츠 선수가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연인 간의 비밀대화방을 만천하에 공개한 적이 있다. 연인 간 못할 얘기가 없던 그 스포츠 선수는 여자친구와 비밀대화방에서 수다 떨면서 어떤 여성의 험담과 모욕감을 주는 표현을 했는데 이게 문제가 된 것이다. 연인들끼리의 비밀대화방도 공적 공간으로 언제든 둔갑할 수 있다. 사적 공간이 점점 소멸되고 있다.


어쩌면 미래사회에는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기술이 개발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머릿속에서 음란물을 떠올리거나 상상만 해도 경찰에 잡혀가는 시대가 올까. 사생활의 권리는 확장되는데 역으로 사적 공간은 점점 소멸돼 내가 숨어들어갈 곳이 없다. 아직은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다. 사적 공간이 점점 소멸하는 시대에 일단은 착하게 사는 수밖에 없다. 착한 생각이 착한 행동을 하고 착한 사람을 만든다. 우리 최소한 남의 불행을 돌려보며 더 이상 뒤에서 쑤군대지는 말자. 남의 은밀한 영역을 나눠보며 키득대지 말자. 그것이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지 깨닫자. 직장동료애나 친구들의 우정은 불금에 치맥을 사는 걸로 발휘하자.


윤성옥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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