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윤재웅의 행인일기 34] 유리 피라미드 아래서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루브르 박물관은 프랑스 문화의 꽃이자 유럽 문화의 자존심입니다. 12세기 후반에 작은 요새로 출발했으나 역대 왕들이 증개축을 해서 오늘날 소장 미술품 40만 점에 이르는 세계 최대 박물관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19세기 바빌론에 세워진 완본 비석인 <함무라비 법전>, 고대 이집트 문명의 대표작 <커다란 스핑크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조각으로 평가받는 <밀로의 비너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이런 여행기에 루브르를 개관하는 일은 어리석습니다. 하루 종일 돌아보고 내린 결론입니다. 전시품이 10만 점인데 한 번 가서 보는 건 1천 점도 채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루브르가 전시공간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작품과 순수하게 마주하는 신비한 순간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죠. 거대한 작품 창고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관람객의 동선과 체력, 작품의 아우라(Aura)와 마주할 수 있는 분위기보다는 작품의 물량 과시가 주가 되는 듯합니다. 처음엔 감탄하지만 점차 지치고 질리고 피곤해지지요.

루브르에 대해 말한다면 저는 루브르의 정체성에 새로운 감각을 도입한 특별한 기념물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박물관 중앙광장의 빈 터에 세워진 ‘파괴적 혁신’의 상징. 1981년 중국계 미국 건축가 I.M. 페이가 디자인한 유리 피라미드입니다. 중세풍의 고색창연한 ‘ㄷ’자형 박물관 건물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기념물이지요. 주 피라미드 주변에 작은 피라미드가 3개 더 있고 그 사이에 예쁜 분수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광장 자체가 고전과 현대, 돌과 유리와 물이 결합한 새로운 디자인이 된 겁니다. 상식과 관습을 파괴하는 충격적인 배치입니다.


그 아래 지하광장은 박물관 입구. 피라미드를 통해 프랑스 최고 박물관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느낌입니다. 밤에는 조명이 들어와 색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지요. 저는 차를 타고 일부러 여러 번 돌아보기도 하고 내려서 거닐어 보기도 합니다. 고대 이집트와 미래의 파리가 만나는 듯한 기분이 들지요. 한편으론 소설 속 세계로 들어가는 체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유리 피라미드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2003)의 주요 배경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는데 이 소설은 하버드대학의 로버트 랭던 교수가 파리를 방문했다가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내용을 다루는 추리물입니다. 루브르 박물관 관장이 의문을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하지요.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하여 딸을 낳고 그 딸의 후손이 프랑크의 메로빙거 왕조의 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혈통으로 이어졌다는 내용 때문에 일파만파로 논란이 번진 작품입니다. 이 소설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장소가 바로 루브르 박물관입니다. 밤의 조명이 찬란한 유리 피라미드는 어쩐지 무서운 비밀을 간직한 공간처럼 묘사되기에 적격입니다. 충격과 파격의 디자인은 봉인된 역사의 비밀 해제를 다루는 소설의 배경지로 안성맞춤이 아니겠는지요.

페이의 설계안이 발표되자 프랑스 전체가 발칵 뒤집힙니다. 여론은 경악과 전율로 들끓습니다. 여론을 움직이는 프레임은 ‘루브르를 망친다!’ 광장에는 연일 반대 시위가 벌어집니다. 미테랑 대통령은 대형 국책사업 ‘그랑 프로제(Grand Projects)’ 가운데 하나인 ‘그랑 루브르(Grand Louvre)’를 밀어붙입니다.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바꾸지 못하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문화 사업이야말로 개혁의 모든 것이다.”라는 게 미테랑의 정치철학이었습니다. 14년 재임 기간 동안 8조원을 들여 9개의 거대 건축물을 성공리에 완성한 대통령. 그는 루브르 재건축 과정에 건축가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최대한 존중했습니다. 부족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지하를 파고 박물관을 현대화하는 기본정신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정치적 용기도 보여주었지요. 1989년 루브르 중앙광장에 유리 피라미드가 완공되자 그 효과가 입증되기 시작합니다. ‘루브르를 망친다!’는 ‘루브르가 다시 태어난다!’로 바뀝니다.


박물관 입장을 위해 바깥에서 긴 줄을 서야 했던 방문객들은 이제 유리 피라미드 아래 지하광장으로 들어가서 대기하는 이색 체험을 합니다. 채광 좋은 넓은 공간 때문에 지하라는 느낌도 없습니다. 어머니 자궁 속 같이 따뜻하고 편안하지요. 매표소는 물론 레스토랑, 서점, 강당 등 관람객을 위한 공간이 넉넉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지상에 돋은 유리 피라미드 아래 지하에는 투명한 역피라미드 구조물이 고드름처럼 달려 있네요. 공중에 떠 있는 역피라미드 구조물 아래에는 돌로 만든 작은 피라미드가 아슬아슬 닿을 듯한 거리에 있습니다. 일순, 공간 전체에 긴장감이 생깁니다. 관람객들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기하학적 불균형을 몸소 체험할 수 있지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보고 느낍니다. 사진 찍는 심리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 것일까요? 과거와 현재의 공존. 문화유산의 재창조. 수학의 역동적 아름다움!


문학평론가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이슈 PICK

  •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국내이슈

  • "죽음이 아니라 자유 위한 것"…전신마비 변호사 페루서 첫 안락사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대학 나온 미모의 26세 女 "돼지 키우며 월 114만원 벌지만 행복"

    #해외이슈

  •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PICK

  • "쓰임새는 고객이 정한다" 현대차가 제시하는 미래 상용차 미리보니 매끈한 뒤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마지막 V10 내연기관 람보르기니…'우라칸STJ' 출시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 용어]'비흡연 세대 법'으로 들끓는 영국 사회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