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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30]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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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어떤 서점에는 책 읽는 고양이가 살고 있죠. 이름이 ‘애지(Aggie)’입니다. 제가 갔을 때는 2층 강변 쪽 창가 의자에 앉아 쌔근쌔근 잠자고 있더라구요. 오후 5시 무렵에 말입니다. 고요하게 웅크린 것이 짙은 회갈색 털실뭉치인 줄 알았습니다. 바로 옆 탁자 위 메모지엔 재미나는 글이 적혀 있네요. ‘애지가 밤새 책을 읽고 잠들었으니, 그녀를 깨우지 마세요.’ 미소가 빙그레 머금어집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유머인 거죠.


캐나다 신문사의 기자였던 제레미 머서가 쓴 회고록 형식의 소설 『시간이 멈춰버린 파리의 고서점』 첫 장에도 고양이가 등장합니다. 물론 같은 고양이는 아닙니다. 그가 이 서점에 처음 왔을 때가 2000년이니까 어쩌면 그 고양이는 저승에 있을지도 모르죠. 애지의 할머니뻘쯤 아닐까요? 제레미 머서는 범죄자에 관한 책을 썼다가 그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당하자 신문사를 사직하고 파리로 도망칩니다. 노숙자 신세로 시내를 전전하다가 비 피해 찾아든 곳이 이 서점이었던 거죠.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치며 카운터의 점원을 지나 검정고양이에게 윙크를 한 뒤 초록색 문으로 나갔다. (…) 문고본 책들이 비에 젖어 부풀어 있었다. (…)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나를 향해 비죽이 나와 있었다. (…) 내가 계산할 차례가 되자 젊은 여자 점원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내 책의 표지를 넘겼다. 속표지에 아주 조심스럽게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 문장(紋章)을 찍었다.”


고색창연한 책들이 가득한 곳. 절반은 서점이고 절반은 도서관이면서 가난한 문인들을 재워주고 먹여주며 후원하는 곳. 20세기 영문학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1922)를 무삭제판으로 처음 출판해준 곳. 헤밍웨이, 거트루드 스타인, 피츠제럴드, T.S. 엘리엇 등 20세기 문학의 빛나는 별들이 이곳 파리에 와서 인연을 맺은 곳.


오밀조밀한 공간. 구불구불 미로 같은 길. 2층으로 오르는 나무계단 냄새. 층계참 끝에 놓인 구식 타자기. 피아노와 삐딱한 사다리가 함께 놓여 있는 곳. ‘제 주인공은 매력적이죠!’라며 서가의 책들이 도란거리는 곳. 거기 문학의 토끼굴 같은 곳에 웅크리고 잠든 고양이 여인 ‘애지’. 여기가 바로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 서점입니다. 시테 섬 근처 센 강변 거리에 있는, 파리에 있지만 파리보다 더 가고 싶은 ‘책들의 고향’이죠.

창립자 실비아 비치(Sylvia Beach)가 1919년에 문을 연 후 100년을 맞은 책방입니다. 건물 입구에 셰익스피어 초상이 그려져 있고 그 앞 낡은 벤치에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글이 영역되어 있습니다. “한 줄기 햇살과 비어 있는 벤치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네요. 햇살 좋은 벤치에 앉아 책 읽는 삶을 권유하는 ‘문학 토끼굴’ 안내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책 읽는 나라. 책 읽는 시민. 책 읽는 문화를 온몸으로 느낍니다.


일반인들에겐 영화 <비포 선셋>의 촬영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 도입부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거죠. 작가가 된 제시가 셀린느와의 사랑을 책으로 만들고 이 서점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죠. ‘미국 남자와 프랑스 여자의 사랑, 작가의 경험 아닌가요?’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그 자리에 셀린느가 9년 만에 다시 나타납니다. 뜨거운 사랑과 애틋한 이별이 가슴에 오래 남는 영화. 서점 풍경이 영화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죠. 책을 좋아하고 작가를 사랑하는 문화가 화면에 가득합니다. 그래서 이 서점 이름은 ‘셰익스피어와 그 친구들’로 번역하는 게 좋습니다.


이 전설 같은 서점의 창업자인 실비아 비치. 섬세한 감각과 순수한 마음과 좋은 질문을 재산으로 가진 그녀가 1962년에 타계하자 미국인 조지 휘트먼이 서점 이름을 물려받습니다. 그는 실비아 비치가 그랬던 것처럼 작가들을 존중하고 후원합니다. 2011년 조지가 작고하자 뒤를 이어 그녀의 딸이 맡아서 하고 있지요. 3대 주인인 그녀의 이름은 실비아 휘트먼입니다. 그녀의 남편 데이빗도 그녀를 도와 서점에서 일을 합니다. 철학박사 학위가 있는 지성인인데 서점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합니다.


이들을 보면 느끼는 게 많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의 행복을 생각합니다. 책을 사랑하고 작가를 후원하며 이웃과 따뜻하게 소통하는 삶. 그게 바로 향유인 거죠. 일과 삶이 하나 되어 즐기는 경지를 다음 세대들은 꼭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늘 은은하게 향기가 난다면 이게 바로 생의 향유가 아니겠는지요.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 시집을 사서 속표지에 서점 문장을 찍어달라고 점원에게 내어 밉니다. 향유하는 삶을 좋아하는 벗에게 선물할 예정입니다. 날이 어둑해집니다. 때마침 고양이 애지도 일어납니다. 보들레르가 ‘학문과 향락의 벗’이라고 노래한 고양이. 이제 책을 읽으려나 봅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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