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9월 개조(改造)라는 일본 잡지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이렇게 썼었다. 도요(東洋)대학 철학과 교수였던 그는 '곧 헐리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이 글을 발표했는데 지식인 사회에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고 한다. 당시 조선총독은 광화문을 헐고 경복궁 면전에 대형 청사를 짓는 공사를 추진해 조일(朝日) 지식인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광화문은 해체 후 경복궁 동측 건춘문 쪽으로 이전됐다. 멸실은 겨우 피했으나 원래 자리를 찾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정도전이 의도했던 북한산과 관악산을 잇는 축은 직각에서 5~6도 정도 틀어져 있다. 이 축은 600년 전 한양의 도시설계 원칙을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당시 동북아에서 도시를 설계할 때 참조했던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는 왕궁 전면의 주작대로는 직선으로 개통한다는 원칙이 있었으나 정도전이 구상했던 축에는 이를 뛰어넘는 생각의 깊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총독은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듯하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하면서 조선조 500년간 유지했던 축을 단숨에 바꾼다. 광화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없애버렸듯이 이 축도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 한술 더 떠 정도전이 경사진 축을 만들 때 했던 생각을 비합리로 격하시켜버렸다. 그뿐이 아니다. 경복궁 소유권을 뺏은 후에는 여러 전각을 해체, 민간에 매각했다. 그렇게 조선의 궁궐은 요릿집이나 부잣집 주택의 재료로 사라졌다.
광화문은 광복 이후에야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90년대 중반이 돼서야 조선총독부 건물은 없어졌다. 우리가 걷고 있는 광화문광장과 세종로는 아직도 일제가 바꿔버린 축상에 있다. 물론 육조거리는 흔적도 없다. 지난해부터 서울시가 국제공모를 추진해 새로운 광화문광장 설계안을 뽑는다. 70개 작품이 전 세계 17개국에서 모였으니 일단 흥행에는 성공을 했다. 서울의 광화문광장이 지구촌 건축가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음을 입증한 셈이다.
김세용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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