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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칼럼] 광화문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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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은 이제 경각에 달렸다. 무자비한 끌과 매정한 망치가 너의 몸을 조금씩 파괴하기 시작할 날이 머지않았다. 너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너를 슬퍼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너를 구하고 싶어하는 사람, 너를 슬퍼하는 사람은 한민족인데, 그 한민족은 너를 구할 수 없다."

1922년 9월 개조(改造)라는 일본 잡지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이렇게 썼었다. 도요(東洋)대학 철학과 교수였던 그는 '곧 헐리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이 글을 발표했는데 지식인 사회에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고 한다. 당시 조선총독은 광화문을 헐고 경복궁 면전에 대형 청사를 짓는 공사를 추진해 조일(朝日) 지식인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광화문은 해체 후 경복궁 동측 건춘문 쪽으로 이전됐다. 멸실은 겨우 피했으나 원래 자리를 찾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광화문만 수모를 당한 게 아니었다. 한양의 설계자 정도전(鄭道傳)은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와 관악산의 최고봉인 연주대가 연결되는 축상에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을 앉혔더랬다. 풍수지리와 유교 사상을 결합시킨, 과연 정도전다운 절묘한 배치였다. 경복궁내의 주요 건물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은 오늘도 이 축 위에 놓여있다. 두 산 주봉(主峯)의 연결선상에 광화문을 놓다보니 광화문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주작대로는 약간 꺾이는 걸 피할 수 없었다. 꺾인 축선에는 폭 51~53m에 달하는 광폭의 육조거리를 조성했다. 경국대전에서 대로(大路)의 폭을 56척(17.5m 정도)으로 했던 것을 보면 광화문 일대는 600년 전에도 국가상징로였던 셈이다.

정도전이 의도했던 북한산과 관악산을 잇는 축은 직각에서 5~6도 정도 틀어져 있다. 이 축은 600년 전 한양의 도시설계 원칙을 드러내고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당시 동북아에서 도시를 설계할 때 참조했던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에는 왕궁 전면의 주작대로는 직선으로 개통한다는 원칙이 있었으나 정도전이 구상했던 축에는 이를 뛰어넘는 생각의 깊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총독은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던 듯하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하면서 조선조 500년간 유지했던 축을 단숨에 바꾼다. 광화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없애버렸듯이 이 축도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 한술 더 떠 정도전이 경사진 축을 만들 때 했던 생각을 비합리로 격하시켜버렸다. 그뿐이 아니다. 경복궁 소유권을 뺏은 후에는 여러 전각을 해체, 민간에 매각했다. 그렇게 조선의 궁궐은 요릿집이나 부잣집 주택의 재료로 사라졌다.

광화문은 광복 이후에야 원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90년대 중반이 돼서야 조선총독부 건물은 없어졌다. 우리가 걷고 있는 광화문광장과 세종로는 아직도 일제가 바꿔버린 축상에 있다. 물론 육조거리는 흔적도 없다. 지난해부터 서울시가 국제공모를 추진해 새로운 광화문광장 설계안을 뽑는다. 70개 작품이 전 세계 17개국에서 모였으니 일단 흥행에는 성공을 했다. 서울의 광화문광장이 지구촌 건축가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음을 입증한 셈이다.
이들이 자웅을 겨루고 오늘(21일) 당선작을 발표한다. 새로운 광화문광장 만들기 프로젝트는 광화문광장을 물리적으로만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선조들이 한양을 설계할 때 했던 깊은 생각을 반추해보고 지난 세월 동안 서울과 광화문 일대에 켜켜이 쌓인 유무형의 흔적들을 창의적으로 진화시키는 작업일 것이다. 100년 전의 아픔일랑 후련하게 씻어버리고 더 큰 도약을 예지하는 작품이 선정되길 기대해 본다.

김세용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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