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오후 한 詩]담쟁이를 위하여―아버지/배영옥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당신의 빛나는 손바닥을 가진 적이 있지. 당신 손바닥 위에서 나는 검불처럼 잠들기도 했지.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 봐 나는 매일 뒷골목을 맴돌았지. 당신 손바닥에 있을 때만 나는 어린아이였지. 여전히 어린아이고 싶었지. 당신 손바닥에 달린 천 개의 창으로 나는 세상을 보았지. 당신 손바닥이 보여 주는 뒷골목의 사람들은 아름다웠지.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 봐 나는 매일 붉은 벽에 서서 바람을 마셨지. 지독한 행복이었지. 당신 손바닥에 아로새겨진 그 빛나는 상처를 품고 나는 어른이 됐지. 어린아이고 싶은 어른이었지. 혼자서도 손바닥을 뒤집을 수 있는 어른이었지만, 나는 결코 손바닥을 뒤집을 수 없었지. 행여 당신 손바닥이 쏟아질까 봐,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 봐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살았지. 그리운 기척 같은 버릇이었지.

[오후 한 詩]담쟁이를 위하여―아버지/배영옥
AD
원본보기 아이콘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현대시는 몇 편 혹은 때론 시집 한 권을 다 얽어 읽어야 그 속내를 짐작할 수 있다. 그 까닭은 현대시의 처소인 인간의 내면이 그만큼 다양한 주름들과 겹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시만 해도 그렇다. '담쟁이'로 표상된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시적 화자 간의 관계는 단선적이지 않다. 예컨대 "지독한 행복"이라든지 "빛나는 상처"라든지 "당신을 열면 당신이 사라질까 봐"라는 구절들은 단지 역설이거나 반어가 아니라 몇 마디 말로는 결코 해명할 수 없을 생의 온갖 굴곡들이 부풀어 오르거나 깊이 패인 "기척"들인 셈이다. 그런데 그 "기척"들은 과연 그립기만 했을까. 안타깝게도 배영옥 시인은 올 여름에 타계했다. 채상우 시인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하이브 막내딸’ 아일릿, K팝 최초 데뷔곡 빌보드 핫 100 진입

    #국내이슈

  •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대학 나온 미모의 26세 女 "돼지 키우며 월 114만원 벌지만 행복" '세상에 없는' 미모 뽑는다…세계 최초로 열리는 AI 미인대회

    #해외이슈

  •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 황사 극심, 뿌연 도심

    #포토PICK

  • 매끈한 뒤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마지막 V10 내연기관 람보르기니…'우라칸STJ' 출시 게걸음 주행하고 제자리 도는 車, 국내 첫선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비흡연 세대 법'으로 들끓는 영국 사회 [뉴스속 용어]'법사위원장'이 뭐길래…여야 쟁탈전 개막 [뉴스속 용어]韓 출산율 쇼크 부른 ‘차일드 페널티’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