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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채무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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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김현정 기자] "○○아줌마가 엄마 돈 가지고 도망갔대."

2004년 초겨울. 중국 베이징에서 어학연수 중이던 내게 언니가 갑작스레 서울 소식을 전했다. "너 걱정한다고 엄마는 말하지 말랬는데,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싸구려 고깃집에서 밥을 먹던 나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돈을 떼이는 스토리들이 대개 그렇듯, 가해자는 아주 어릴적 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동네에서 가장 큰 갈빗집을 했고, 함흥냉면이 정말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보다 열 살 정도는 어린 아들과 딸이 있어 가끔 놀아주기도 했다. 장사가 잘 돼 세 배 되는 자리에 세를 새로 얻고, 화려한 인테리어를 한 그 집은 여기저기에서 돈을 빌렸다. 오래된 재래시장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과일가게, 철물점, 문방구, 생선집 등이 대상이 됐다. 사금융이 성행하던 때라, 녹록지 않은 살림에 다들 이자 몇푼을 기대하고 '갈빗집 사장'에게 물건 팔아 모아둔 현금을 전부 맡겼다. 잠적 며칠 전에도 주변에 손을 벌렸는데 "장사는 잘 되는데, 건물주가 임대료를 너무 올린다"고 한탄했단다.

예정됐던 연수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모친은 돈 되찾기를 포기하고 마음을 정리한 상태였다. 오히려 내가 "그 돈이 어떤 돈인데"하며 언성을 높였고, 보험금이라도 압류해야하는거 아니냐 안절부절했다. "먼저 안 사람들이 가게 고기 한 점 까지 싹 다 가져갔더라". 이후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가족 누구도 그 날 얘기를 하지 않았다. 세상 물정 모르던 나는 어려워진 집안 사정을 체감할 때 마다 그 집을 저주할 뿐이었다. 풍비박산까지는 아니었지만, 우리의 저녁 밥상 자리는 꽤 오랫동안 싸늘했다.

최근 연일 터지는 연예인 가족 사기설, '빚투(나도 떼였다)'라 불리는 채무 스캔들 기사를 볼 때마다 14년 전의 일이 생각난다. 나와 내 가족은 지금 큰 어려움 없이 살고 있지만, 여전히 그때 일을 웃으며 말하지 못한다. 가해자는 돈을 갚지 않은 '숫자'로 그때의 일과 피해자들을 떠올리겠지만, 나의 모친은 자신의 실수로 가족들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사건'으로 당시를 되짚을 것이다. 나는 다만 조용히, 그 집의 아들 딸들이라도 유명인이 돼 나타나 주길 바랄 뿐이다.




김현정 기자 alpha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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