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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웅의 행인일기 20]가우디의 도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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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에서 기차를 타고 스페인 동부 산간지대를 가로질러 갑니다. 렌페(Renfe) 열차를 타야 더욱 잘 보이는 아름다운 산야. 넓은 초지. 부드러운 산 구릉. 끝없이 이어지는 올리브나무 밭. 8백Km 넘는 거리를 가고서야 도착하는 지중해 해안 도시. 여기는 바르셀로나입니다.

콜럼버스가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얻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후 금의환향한 벨 항구. 에스파냐 국토보다 스무 배나 큰 땅이 통째로 굴러들어오자 여왕은 버선발로 뛰어나가 탐험가를 맞이합니다. 많은 대신들이 반대했을 때 이탈리아 출신의 풋내기 탐험가에게 투자를 한 여왕 자신도 모험가였던 거죠. 대항해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항구 앞에 콜럼버스 동상이 높다랗게 서 있습니다. 이사벨라와 콜럼버스의 도시 바르셀로나.
하지만 저는 바르셀로나를 가우디(1852~1926)의 도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많은 건축가들의 찬사를 받는 동시에 그들을 절망시키는 창의의 아이콘. 인간의 집과 마을에 자연의 원리를 적용시킨 대자연의 전령사. 성가족 성당을 설계하고 시공자들과 함께 일했으며 초라한 행색으로 전차에 치여 숨지는 그날까지 혼을 다 바친 예술가. 그는 오직 건축과 결혼했으며, 건축의 신전에 자신을 송두리째 바쳤으며, 건축을 모든 예술의 꼭대기에 올려놓은 주인공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 속에서 살다가 일과 함께 죽었죠.

우리에게도 이런 삶이 가능할까요? 직업이 아닌 일. 자기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 인생 전체를 던져 자기와 타인의 행복을 위해 일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삶의 진정한 목적이 일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는 걸 현대교육은 잘 가르치지 않습니다. 경쟁, 효율, 교환가치의 비정한 명령들만 유령처럼 떠돌아다니죠. 유령의 명령으로 살아가는 삶.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명령받고 사는지 모릅니다. 학교의 명령, 직장의 명령, 생계의 명령. 온갖 종류의 명령 명령들. 가우디는 다르죠. 스스로 좋아하는 일 속에 살면서 다른 사람도 그를 좋아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길을 걷다가 바르셀로나에 흘러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가우디에 홀리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일 속에 철학과 예술과 역사를 비벼 넣어 수십 세대의 후손들에게 전해준다는 걸 피부로 느끼게 되는 거죠. 실제로 바르셀로나를 방문하는 전 세계 수백만 관광객들은 가우디의 유산을 보기 위해 오늘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립니다. 성가족 성당,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 구엘 공원은 독창과 경이로 인류를 즐겁게 합니다. 파도가 굽이치는 모양의 집 '카사 밀라'가 지어졌을 때 언론은 지탄 일색이었습니다. 인공적인 선(線)을 뛰어넘으려는 자연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집이였으니까요. 당시엔 이해를 못했습니다. 옥상의 다채로운 굴뚝들 중에는 영화 <스타워즈>의 병사 투구 제작에 영감을 주는 디자인도 있습니다. 준공 100년 조금 넘은 지금 아직도 세 가구가 삽니다. 입주민 할머니는 요즘도 자기 집에서 새로운 걸 발견한다며 놀라워합니다.
그는 '자연의 진정한 제자'이기도 하죠. 가우디 건축에 직선이 없는 건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괴테의 자연론에 영감을 받은 때문이라고 하지만, 자연에 대한 철학과 깊은 사랑이 없이는 불가능한 경우입니다. 어지럽고 특이한 그의 건축들을 살펴보면 결국 일의 최고 경지는 예술이고 자연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인공이기는 하되 자연을 옮겨온다는 발상에 우리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바르셀로나 외곽의 신성한 산인 몬세라트(Montserrat)를 닮은 성가족 성당. 앞바다의 파도를 닮은 카사 밀라. 저는 그 중에도 자그마한 산언덕 전체를 지상 천국으로 만든 구엘 공원을 주목합니다. 가우디를 평생토록 후원한 부호 구엘. 절친한 친구이자 예술을 사랑하는 동료이기도 했던 구엘은 돈 가진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돈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켜 부가가치가 지속되도록 하는 안목이 있었으니 말입니다. 구엘이야말로 가우디라는 천재를 통해 스페인을 먹여 살리는 일자리 창출의 진정한 주인공인 겁니다. 뭇 사람 이롭게 해주는 이가 현대사회의 참된 보살 아니겠는지요. 가우디는 그런 구엘을 위해 산언덕 전체를 디자인합니다.

자유분방하고 울퉁불퉁한 비정형 구성. 몬세라트의 거친 표면을 닮은 우툴두툴한 질감.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건축 상상력이 놀랍습니다. 그 가운데, 가우디의 상징인 도마뱀 조각상 앞에 서 봅니다. 울긋불긋 원색 타일 조각들을 이어붙인 천진난만한 동심 앞에서 카멜레온의 무한변신을 새로 발견합니다. 그는 건축에서 유기체 생명을 꿈꾸었죠. 동물처럼, 식물처럼, 살아 있는 건축을 창조한 겁니다. 그 일이 생명의 본성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었으니까요. 무엇이 생명의 본성인가요? 생지변야(生之變也). 생명이란 변하는 것. 정체하거나 안주하지 않는, 바람 같은 그것. 사랑과 번식의 운율(韻律) 건축!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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