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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당당할 수 있는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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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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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부모 가족들이 입소한 복지시설에 아이 돌보미를 파견하는 비용을 국가가 지원함으로써 미혼모 등의 자립을 돕는 취지의 사업으로 61억원 예산을 지원하려던 계획이 모 국회의원의 반대로 무산될 위기에 처해 기획재정부 차관이 울먹이며 호소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 사업이 중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동의하지만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고 한다.

여기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유행처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사업이 중요하다는 점에 일단 동의하면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은 곤란하다고 했는데 한부모 복지시설에 아이 돌보미를 파견하는 지원이 그 아이들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거창한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 우리나라 예산 규모에 그 정도 지원을 갖고 차관이 눈물로 호소해야 하는가. 생계가 어려운 한부모 가족들도 엄연히 이 땅의 국민된 자들인데, 이들의 복지를 바라보는 국회의원 의식 수준이 이러니, 국회의원 숫자 줄이고 권리도 대폭 삭감하자는 이야기가 국민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지난 토요일에는 세월호의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자는 취지로 매달 개최되는 304 낭독회에서 시를 읽었다. 쉰한 번째 이어오는 행사다. 내게 세월호의 기억은 천사섬의 기억과 겹쳐진다. 2014년 4월16일부터 18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는데 세월호의 기막힘은 먼 옛날 샌프란시스코 앞바다 천사섬에 억류됐던 나라 잃은 한인들의 기막힘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당시 나라를 잃고 떠돌다 도착한 미국에서 입국이 거부당해 천사섬에 머물며 서러움 절절한 시를 썼던 주인공은 그래도 그 낯선 땅에서 살아남았다. 후손을 잇고 미국 한인 이민 역사를 새로 썼으니 그 시절 나라 잃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 땅에서 국가의 부재를 경험하는 사람들, 힘없이 버림받은 여성과 어린이들보다 오히려 덜 비참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대한민국. 다문화 가정의 아이는 왕따 폭력으로 목숨을 잃고, 한부모 가족은 지원 예산이 삭감당하고, 태어나는 생은 죽음에 훨씬 못 미치는 인구절벽의 나라. 계량할 수 없는 것들, 이윤을 남기지 않는 모든 것은 무용하다며 존재 가치를 상실하는 나라. 다른 이의 아픔을 감각하는 공감은 무용한 것으로 치부되고 오로지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만이 최상으로 인정되는 교육. 정말 이 땅은 사람으로 살기에 적당하지 않은 곳인가. 이 땅의 국민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지원을 막으려는 국회의원에게 정치는 어떤 의미이며 국가의 존재 의미는 무엇일까.
가을 세상을 떠난 김서령 작가는 행복의 조건으로 당당함을 꼽았다. 당당해야 행복할 수 있다. 내가 세상 속에서 당당하자면 "내 곁에 있는 물건과 사람에게 애정과 정성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며 이것이야말로 단순하고 명료한 인생의 비밀이라 했다. 그 비밀은 위태로운 나날을 살아가는 개인으로서의 자존을 지키는 문제뿐 아니라 국가의 통치 기술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기울이는 애정과 정성이 권세 있는 자들, 이윤을 만드는 것들에게만 향하고 있지 않는지, 도움을 기다리는 사각지대, 힘없는 존재에게 정성을 쏟아 그들이 당당하게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만드는 일. 이것이 바로 국가가 할 일이고 정치가 할 일이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국회의원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지금 정치가 국민으로서 당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고 있는가?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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