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서 반갑다. 우리는 원래 우주 나그네야. 지구에 와서 가족으로 만나지만 저마다 자유로운 목숨인 거지. 그 자유, 존중해줄게." 아들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삶은 그런 게 아닐까요? 영원한 나그네들이 가족으로, 이웃으로 잠시 만났다가 돌아가는 거죠. 그러고는 다시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겠지요. '아기'라는 새 옷을 입은 채 말입니다. 슬플 것도 허무할 것도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에게 다정하면 족합니다.
버스기사가 세 명이나 되는군요. 승객은 기사보다 조금 많네요. 승객 밀도가 낮으니 몽상 밀도가 올라갑니다. 스페인 서북부에서 서남부를 관통해 내려가는 길. 오후 4시에서 아침 7시를 향해 가는 여로. 붉은 땀 흘리는 적토마 등에 타고 삼천리 달리는 쾌남아 기분이랄까, 가슴 설레고 재미납니다. 고원, 산지, 들판, 강물, 구름, 소나기, 무지개…, 반대편 차창 밖에는 노을과 저녁별. 그리고 먼 산에 희끗한 눈. 긴 밤과 짧은 저녁 사이. 진한 코발트빛 하늘 커튼 천천히 내려 오늘 공연의 막이 내리려는 찰나. 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미끄러져 나가는 시간. 구름처럼 흘러가는 저 시간!
하늘에 같은 구름 없듯, 흘러가는 시간은 같아 본 적 없습니다. 쪼개서 보면 지금 이 순간만 있을 뿐. 순간 없이는 시간 없고 시간 없이는 영원도 없지요. 영원은 망령의 그림자. 몸 떠난 허깨비. 들숨 날숨 오가는 지금만이 삶의 전부. 여기가 영원의 입구인 거죠. 버스 의자에 어깨 파묻고 '순간이 영원'이라는 이상한 화두를 마주합니다. 창밖엔 이국정취. 점점 더 초롱초롱해지는 신경. 한 순간 한 순간, 한 장면 한 장면이 아름답고 경이롭습니다. 누구는 가장 위대한 경전이 '순간경'이라 했다지요. 만고의 명언입니다. 사랑과 다정도 순간순간 태어나는 겁니다.
잠시 눈 돌려 보니 승객이 제법 많습니다. 버스가 휴게소에 들어서면 식당 안은 우리 손님만으로 흥성거립니다. 점원은 주문받느라 정신 못 차립니다. 거짓말처럼, 우리가 떠나면 휴게소는 문을 닫습니다. 딱 30분간만, 한 버스 승객만을 위해서, 밤의 허리를 잘라 잠도 반납한 채 영업합니다. 재미있습니다.
어느 어둠 속에서 스며들었는지 새벽 2시에 차를 타는 손님도 있습니다. 젊은 두 연인이 작별 키스를 하고 여자만 차에 오릅니다. 그녀는 사람과 헤어진 후 기계와 데이트 합니다. 휴대폰과 미친 사랑에 빠집니다. 손끝에, 입술에, 남아 있던 남자의 온기가 쓸쓸히 떠납니다. 4시간 동안 통화하는 남자도 있습니다. 이 남자는 통화가 끝나면 금세 잠이 들지만 벨이 울리면 바로 받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씨월렁거립니다. 불가사의군요. 예절은 없는데 재미있긴 합니다. 사랑싸움? 원격회의? 부동산 거래? 내용을 모르니 오만 상상을 합니다. 상상이 이야기를 탄생시키죠. 하나의 이야기는 500만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고 영국 소설가 헨리 제임스가 말했습니다. 이야기꾼이 만드는 상상의 꽃은 매순간 무궁무진합니다. 탄생은 각양각색의 기적입니다. 순간 속에 500만 가지 세상이 있습니다. 영원보다 재미있습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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