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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이 가을, 화목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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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 뒤면 가을의 마지막 절기인 상강(霜降)이다. 육지부에선 이맘때 벼 추수가 한창이다. 보통 상강 무렵이면 마무리되고, 삼남지방도 11월 초를 넘기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제주도의 경우는 주 작물이 감귤, 당근, 마늘, 월동무들이라 수확철이 다르거나 늦다. 감귤 농사로 따지면 주품종 조생종은 11월 들어서야 수확을 시작한다. 이런 관행도 농협 등을 통한 계통출하가 보편화된 최근 일이고, 이삼십 년 전만 해도 입동(11월7일) 지나 소설(11월22일) 무렵까지 기다려 감귤이 잘 익은 뒤 땄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제주도에선 한로와 상강절 무렵이 한갓지다. 이 망중한의 시기에 마을 잔치를 마련한다. 곧 2년마다 열리는 마을체육대회다. 내가 사는 서귀포 성산읍에서는 홀수년에 읍민체육대회, 짝수년에 리 단위 마을체육대회를 열어 즐긴다. 추수감사의 의미를 담은 마을 대동제를 갖되 운동회 형식을 따른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 우리 마을 '신풍리체육대회'는 지난 일요일에 열렸다. 마을 전체 9개 반 주민들을 세 팀으로 나눈 뒤, 마을 밖 제주시 등지에 사는 이들을 묶은 향우회 팀을 합해 전체 4개 팀이 천연잔디가 깔려 있는 마을 체육공원에서 한바탕 운동회를 펼쳤다.
마을체육대회의 운영 철학과 규칙은 '화목(和睦)'이다. 투호놀이부터 축구, 줄다리기, 기마전, 이어달리기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경기가 벌어지고 경기마다 세부 규칙이 없는 것이 아니나, 실력을 뽐내고 우열을 가리는 것이 우선인 자리가 아니기에 결국 화합과 단결을 잘하는 팀에 우승기가 돌아가는 것이 보통이다.

유초등생부터 '망(望) 100세 어르신'까지 모두 선수고 응원단이다. '잘한다, 힘내라'가 경기마다 울려 퍼진다. 자기 팀만을 응원할 이유가 딱히 없다. 반이 달라 팀을 나누었을 뿐이지 같은 마을 사람에 대개 친족이니 '민우 삼촌, 용태 아방 힘내라! 우리 조카 군혁이, 민상이 잘 뛴다!' 같은 격려와 칭찬으로 팀을 가림없이 응원한다. 간혹 이거다 저거다 규칙 문제로 티격태격하기도 하지만 심판을 맡은 마을 연장자가 이러자 저러자 하면 금방 조용해진다.

10월 바람 좋고 볕 좋은 날을 골라 이렇게 311세대, 674명(2017년 12월31일 기준) 신풍리 주민에 향우회 인사들까지 함께 모여 한바탕 화목잔치를 여는 날은 '작은 대한민국'을 보는 듯하다. 남녀노소의 세대와 성별, 빈부의 차이, 성향과 성품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래도 하루 온종일 맘껏 목청을 높이고 정을 나누며, 그 모든 구분과 차이를 내려놓고 '화목' 하나로 뭉치니 미덥고 귀할 뿐이다.
요즘 국정감사장의 열기가 뜨겁다. 국회와 정부, 소속이 어디든 위정자들이 한결같이 추구하는 공동선은 '내남 차별 없이 모두 사람답게 잘사는 대한민국 만들기'일 것이다. 그런 만큼 위정자들이 국민 앞에 보이는 행동거지도 '화목'을 잊지 않는 품격을 갖추었으면 한다. 시기와 질투, 불평과 원망, 저주와 폄하, 무례와 무지가 난무하는 난장판을 벌이는 당사자가 바로 자신들이라는 자각조차 없다면, 저 어느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마을체육대회에 가서 배울 일이다. '화목'은 화해와 용서를 거름삼아 피어나는 꽃이고, 이 열매들이 모여야 고관대작과 선량 여러분이 그렇게 핏대 올리며 외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에 앞서 나부터 기도할 일이다.
'이 가을, 화목하게 하소서. 바람과 햇볕은 이제 충분합니다. 이제 우리 마음 밭에 바람과 햇볕을 주시어 불평과 원망, 비난과 질시, 저주의 가라지들은 다 바람과 햇볕에 날아가게 하시고 알곡 같은 화목만 풍성하게 하소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 배려와 존중으로 알알이 열매 맺는 화목을 풍성하게 거두는 이 가을이게 하소서!'

정희성 시인, 제주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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